문화

[박물관 문화 순례] 한국교회사연구소 (중)

심욱 신부(한국교회사연구소 부소장),사진 한국교회사연구소 제공
입력일 2015-07-21 수정일 2015-07-21 발행일 2015-07-26 제 2954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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뮈텔 주교 문서에 담긴 초기 선교사들의 사목 애환
1만3451건 발견, 언어별로 판독 작업
교회사 및 한국 근대사 연구의 주요 사료
지방 사목 사제들 서한·보고서가 주 내용
브뤼기에르 주교의 ‘천묘’(遷墓) 자료 특별
만주 봉천 프랑스 영사가 작성한 유해 통관확인서 봉투.
라리보 주교가 브뤼기에르 주교의 천묘를 부탁하며 몽골 동부대목구장 아벨 주교에게 보낸 편지(1931).
만주의 금주(金州) 천주당 신부가 작성한 브뤼기에르 주교 유해 통관확인서(1931. 09. 17.).
만주 봉천 프랑스 영사가 쓴 브뤼기에르 주교 유해 통관확인서(1931. 09. 18.).
한국교회사연구소가 수집한 여러 자료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G.-C.-M. Mutel, 閔德孝) 주교의 문서다. 이는 본 연구소가 교회사 자료를 수집·정리해 나가던 중 입수한 자료로서, 뮈텔 주교의 문서들은 그가 조선 선교사로 임명된 1877년부터 사망하는 1933년까지 작성된 것들이었다. 문서들은 뮈텔 주교가 생전에 교회 내의 문서와 교회 밖의 문서로 구분해 연도별로 정리한 뒤, 한지로 포장해 100여 개의 종이 상자에 보관하고 있었다.

본래 이 문서 상자들은 주교 집무실에 있었으나, 뮈텔 주교의 사후에 유품들과 함께 주교관 지하실로 옮겨져 보관됐다. 지하실에 보관돼 관심을 받지 못하던 이 문서들은 본 연구소 설립자인 최석우 몬시뇰에 의해 빛을 보게 됐다. 1965년(혹은 1966년), 최 몬시뇰은 서울 명동 주교관 지하실에서 문서 상자를 발견했고, 서울대교구의 허락을 얻어 연구소로 이관했다.

이 문서는 총 1만3451건에 달했는데, 지방에서 사목하는 신부들이 뮈텔 주교에게 보낸 서한과 보고서가 가장 많았다. 그리고 초대장, 명함, 전보, 안내장 등과 같이 희귀한 자료들도 잘 보존돼 있었다.

최 몬시뇰은 이 문서가 교회사뿐만 아니라 한국 근대사 연구의 주요 사료라고 판단했다. 그는 이 자료에 대해 이원순(에우세비오) 교수(현 한국교회사연구소 고문)에게 알렸고, 이 교수는 학계에서도 이 문서를 이용할 수 있도록 일단 정리 작업부터 서둘러 진행할 것을 제안했다. 그래서 최 몬시뇰과 이 교수는 우선 이 문서에 ‘뮈텔 문서’라는 이름을 붙이고 1967년 3월부터 정리 작업을 시작했다. 최 몬시뇰과 이 교수는 ‘뮈텔 문서’를 크게 동양어(東文)와 서양어(歐文)로 분류했다.

동문은 1287건인데 반해 구문은 1만2164건으로 압도적으로 많았다. 동문은 이 교수가, 구문은 최 몬시뇰이 각각 담당했고, 이들 외에 소신학교 교사 이병영(李丙泳)·김명철(金明哲)과 가톨릭대학 교회사연구회(회장 조광) 신학생들이 도움을 주었다. 동문은 구문에 비해 적었기 때문에 정리 작업이 빠르게 진행돼 1968년 8월에 내용 파악을 마쳤고, 10월에 분석 카드 작성도 끝냈다. 이 교수는 일단 동문 문서의 분석 결과를 한국사연구회 학술지인 「한국사연구」 3집(1969. 4.)에 ‘미공개 사료 Mutel 문서’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이에 반해 구문 문서의 정리 작업은 더디게 진행됐다. 문서의 양이 너무 많았고, 프랑스어·라틴어·독일어·영어 등 사용 언어도 복잡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프랑스인 특유의 서체에, 굵직한 펜글씨로 작성됐기 때문에 판독조차도 어려웠다. 이렇게 곤란한 상황에서 다행히도 작은 자매회 프랑스인 수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1970년대 후반부터는 파리 외방전교회 한국지부장 펠리스(P.M. Pelisse, 裵世榮) 신부가 문서를 판독하고, 타이핑 작업도 해주는 등 정리 작업에 큰 도움을 주었다. 연구소는 이처럼 협조자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뮈텔 문서’의 정리 작업을 계속 진행했다.

이러한 ‘뮈텔 문서’ 중 소개하고자 하는 자료는 초대 조선대목구장인 브뤼기에르 주교의 천묘(遷墓, 묘를 옮김)와 관련된 자료들이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5년 10월 조선입국을 위해 만주의 마가자(馬架子)에 도착했다가 병을 얻어 사망했다. 그 후 1931년 조선대목구 설정 100주년이 되는 해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서울대목구에서는 지역 공의회를 비롯한 행사들을 기획했다. 그중 하나가 지역 공의회를 전후해 브뤼기에르 주교의 유해를 조선으로 옮겨오기로 한 일이다.

이에 라리보 주교(서울대목구 부주교)는 몽골 동부대목구장 아벨 주교에게 브뤼기에르 주교의 유해를 서울대목구로 옮기기를 부탁하는 편지를 보냄으로써 그 작업이 시작됐다. 당시 유해 발굴 현장에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는 파견되지 않았지만, 아벨 주교의 지시에 따라 마가자 지역의 사목을 담당하고 있던 중국인 사제들이 1931년 9월 4일 브뤼기에르 주교의 유해를 발굴했다.

이렇게 발굴된 유해는 만주의 금주, 봉천 등지를 거쳐서 열차편으로 이송됐다. 그런데 같은 해 9월 18일에 일본이 만주에서 개시한 군사행동(만주사변)으로 인해 브뤼기에르 주교의 유해 이송 계획에 차질이 생겼고, 주교의 유해는 9월 24일 오전 10시 경에야 서울역에 도착했다. 그리고 10월 15일 종현성당(현 명동성당)에서 뮈텔 대주교와 라리보 주교는 대례 연미사를 올렸으며, 사도예절을 마친 후에 자동차 상여를 이용해 용산 삼호정의 성직자 묘역으로 이동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남겨진 기록들이 본 연구소에 소장돼 있다. 먼저 라리보 주교가 몽골 동부대목구장인 아벨 주교에게 보낸 브뤼기에르 주교의 유해를 조선으로 옮기는 것을 부탁하는 내용의 편지다. 그리고 만주에서부터 서울까지 이송하는 과정에서 받은 만주의 금주(金州) 천주당 신부가 작성한 유해 통관확인서와 봉천 프랑스 영사가 쓴 유해 통관확인서도 남아 있다. 이런 문서들에서 드러나는 노력을 통해 결국 초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는 유해로나마 꿈에 그리던 조선 땅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문의 02-756-1691 한국교회사연구소

심욱 신부(한국교회사연구소 부소장),사진 한국교회사연구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