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주의 창

[방주의 창] 보속 / 인영균 신부

인영균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수련장)
입력일 2015-07-21 수정일 2015-07-21 발행일 2015-07-26 제 2954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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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 교회에서 잊어버린 단어가 하나 있다. ‘보속’이라는 단어다. 보속이라면 고해성사 때 받는 좁은 의미의 보속만을 생각한다. 더 깊은 보속도 있다. 우리 자신뿐 아니라 다른 이의 허물을 위해 우리 자신이 자발적으로 희생 보속하는 것이다. 내 탓이 아니더라도, 다른 이들의 탓 때문에 일어난 악한 결과를 아파하며 기도하는 것, 고통과 눈물의 연대인 것이다.

우리 사회의 관심사는 물질 만능주의에 매몰되어 있다. 대규모 해고 사태와 사대강 사업에서 드러났듯이, 사람과 자연환경은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했다. 이윤과 효율의 극대화라는 허울 아래 탐욕적 신자유주의 경제 논리가 사회 곳곳에 퍼져있다. 사실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 세월호 참사도 돈이 삶의 중심이 된 우리 사회의 자화상인 것이다. 이 안에는 ‘나만 잘 살면 된다’는 극단적 이기주의가 숨어 있다. 여기서 소외와 배척과 불통이라는 죽음의 문화가 생겨난다.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하거나 우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이 많아졌다(복음의 기쁨, 54항).

예수님 자신이 보속의 삶을 사셨다. 이사야 예언자가 고난받는 주님의 종을 두고 한 말이 그리스도께 그대로 실현되었다.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한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우리는 그를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이사 53,3-5). 그 절정이 바로 십자가의 죽음이다.

보속의 삶은 사랑의 삶이다. 이 단어를 다시금 우리 영성에 되돌려 놓아야 하지 않을까. 이것이 프란치스코 교황이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 자신에게 갇히지 말고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복음의 기쁨, 20-24항). 내 자신에게서 나갈 때 우리 마음은 비워지고 주님으로 온전히 채워진다. 내 자신, 내 것, 내 안위라는 좁은 틀에서 벗어나, 너를 위해, 너의 것을 위해 온전히 내어주는 것, 너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함께 나누는 것, 이것이 오늘날의 복음화다.

기도 안에서 세상과 사람들의 고통에 함께 동참하는 영혼이 필요하다.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지만, 그 누구도 알지 못하지만 침묵의 기도 가운데 함께 아파하는 영혼, 얼마나 아름다운 영혼인가. 평생을 봉쇄 수도원에 살며 세상 사람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는 수도자들의 보속, 숨어서 희생 봉사하는 평신도들의 보속, 이것이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한 희생의 삶이다. 우리는 더 좋은 것, 더 화려한 것, 더 편한 것들을 누리려고만 하지 희생을 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내 삶에서 포기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과연 있는가? 모든 걸 거저 받고 거저 누리며 아무 반성 없이 사는 삶, 누릴 수 있다고 기를 쓰고 더 편해지려고 애쓰는 것도 죄와 허물임을 깨닫는다.

2004년 12월 30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나이트클럽에서 큰 화재가 일어났다. 세월호 대참사처럼 194명의 젊은 생명들이 한순간 화마에 목숨을 잃었다. 안전보다 돈을 우선시한 관계자들의 탐욕과 정부의 무능 때문이었다. 책임을 회피하는 정부와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한 국민들로 인해 아파하던 유가족들에게 먼저 다가가 위로의 눈물을 흘려준 이가 있었다. 바로 부에노스아이레스 대교구의 대주교 베르고글리오, 프란치스코 교황이었다. 2009년, 화재 참사 5주기 미사에서 교황이 하신 말씀을 기억하자.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울 필요가 있습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아직 충분히 울지 않았습니다. 일하고 아첨하고 돈 버는 데 골몰하고 주말을 어떻게 즐길까 신경 쓰느라 더는 여기에 없는 우리 아이들을 위해 충분히 울지 않고 그들을 잊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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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영균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수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