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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쇄신의 리더, 스페인 영성가들을 찾아서] (1)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상)

스페인 아빌라 주정아 기자
입력일 2015-07-01 수정일 2015-07-01 발행일 2015-07-05 제 2951호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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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교회의 딸” 온전한 봉헌의 삶 열망한 ‘맨발의 성녀’
신비체험으로 하느님 사랑 깨닫고
봉쇄수도원 통해 교회 개혁 앞장
가르멜 회원 ‘마음의 고향’ 아빌라
강생 수녀원 박물관·생가 성당 등
성녀 영성·발자취 그대로 간직
최근 전 세계 교회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적극적인 권고에 힘입어 새로운 쇄신의 역사를 여는 데 힘쓰고 있다. 돈과 개인의 안녕만을 추구하는 삶에서 벗어나, 하느님과 이웃들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더불어 살아가고자 하는 노력이다. 교회는 시대마다 쇄신과 성찰의 여정을 지속적으로 이어왔다. 특히 ‘예수의 성녀 데레사’와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등은 중세 교회의 쇄신을 이끈 대표적인 인물들로 꼽힌다. 교회와 사회의 새로운 복음화를 위해 그 어느 때보다 적극적으로 응답해야 할 이 때, 가톨릭교회의 보물인 영성가들의 가르침을 되새기는 노력 또한 큰 의미를 지닌다.

특집 ‘쇄신의 리더, 스페인 영성가들을 찾아서’에서는 위기의 순간마다 교회를 일깨운 스페인 영성가들의 삶과 영성의 발자취를 찾아 떠나본다. 이번 호부터 4회에 걸쳐 연재하는 스페인 교회 영성순례는 주교회의(의장 김희중 대주교) 후원, 주교회의 미디어부(국장 이정주 신부) 주관으로 진행됐다.

맨발 가르멜 수도회 첫 발원지인 아빌라 전경. 높이 12m, 길이 2400m의 성벽이 중세적 분위기를 고스란히 품고 있다.

꼬마가 물었다.

“넌 누구니?”

데레사가 대답했다.

“난 예수의 데레사란다.”

꼬마가 말했다.

“난 데레사의 예수인데….”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가 아기 예수를 만난 순간이었다. 밀랍인형 등으로 재현해놓은 이 장면을 보자, 그들의 대화가 귓전에서 들리듯 생생해진다.

스페인 아빌라에 자리한 ‘엔카르나시온 수녀원’(Encarnacion, 강생의 우리 성모님께 봉헌된 가르멜 수녀원, 이하 강생 수녀원)에 들어서자 500여 년을 훌쩍 거슬러 올라간 시간과 마주할 수 있었다.

강생 수녀원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처음과 같은 모습으로 자리한다. 평균 40~50cm는 족히 되는 두꺼운 돌벽이 세상을 철저히 막아선 덕분인지도 모른다. 봉쇄수녀원이지만 입구 왼쪽 수녀원 일부는 박물관으로 꾸며 순례객들에게 공개하고 있다. 묵직한 수녀원 출입문에는 안쪽과 바깥쪽을 잇는 줄 하나가 걸려있다. 끈을 당겨 종을 울리면 바깥쪽에서 문을 열어주는 형태다. 안에서는 문을 열 수 없다. 흔히 죽어서도 나올 수 없다는 봉쇄수도원의 실재가 두꺼운 나무문을 통해 먼저 다가왔다. 면회실조차 회전식 문으로 막혀있다. 수도자들은 가족들의 얼굴조차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다만 편지와 음식 등을 회전식 문을 통해 전달했다고 한다. 고해실도 두꺼운 창살로 가로막혀 있다.

맨발 가르멜 수도회의 발원지

아빌라는 맨발 가르멜 수도회의 발원지이다.

데레사 성녀는 이곳에서 맨발 가르멜 수도회를 세우고, 첫 수도원인 ‘성 요셉 수녀원’의 문을 열었다. 성녀가 나고 자란 곳이기도 하다. 덕분에 아빌라는 전 세계 가르멜 회원들의 마음의 고향이 됐다.

맨발 가르멜 수도회의 주요 거점들을 품고 있는 작은 도시 아빌라를 순례하다보면 중세시대의 분위기 또한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이곳은 현재 세계에서 유일하게 로마식 성벽이 완벽하게 보존된 곳이다. 성당도 돌산 한쪽에 돌벽을 쌓아올려 지어 성벽과 하나를 이루고 있다. 세계적인 중세도시인 프랑스 카르카손의 경우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거쳤기에 정확히 예전 그대로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에서 85km 거리에 위치한 아빌라는 8세기 이슬람 세력들이 스페인을 정복했을 때부터 11세기 말 그리스도교에 의한 국토회복운동이 일어나기까지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가 공방전을 벌인 최전선이었다. 파괴와 재건을 되풀이한 끝에 1099년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개축, 교회와 옛 궁전 등은 로마네스크에서 고딕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건축 양식을 드러내 더욱 눈길을 끈다.

대부분의 순례객들이 우선 발길을 옮기는 곳은 데레사 성녀의 생가(生家) 터에 지은 기념성당과 맨발 가르멜 수도원으로 구성된 ‘라 산타’(La Santa)이다. 생가 성당 수도원 1층 박물관에서는 데레사 성녀의 신발과 서한 등의 복사본들과 각종 유품들을 볼 수 있다.

이곳 박물관에는 데레사 성녀가 「자서전」과 「완덕의 길」 등을 집필한 수방도 재현돼 있다. 성녀의 주요 작품들과 십자가의 성 요한,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 에디트 슈타인 성녀 등 맨발 가르멜의 여러 성인들에 대한 개괄적인 소개 자료도 전시돼 있다.

이어 강생 수녀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은 ‘예수의 데레사’ 성녀가 가르멜 수도자로서 수도생활을 시작하고, 수도생활의 1/3가량을 보낸 곳으로 중요성을 더한다. 데레사 성녀 영적 여정의 최고봉인 ‘영적 약혼’과 ‘영적 결혼’의 은총 체험도 바로 이 수녀원에서 이뤄졌다.

데레사 성녀의 수도생활과 신비체험 등의 흔적이 남은 수녀원을 한 바퀴 돌고 밖으로 나서면 마당 한가운데에 서 있는 십자가와 바닥에 그려진 7개의 궁방이 좀 더 쉽게 이해된다. 데레사 성녀는 신비체험에 따라 기도 단계를 7개 궁방으로 이뤄진 ‘영혼의 성’으로 설명했다. 이는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성 안으로 점점 더 깊이 파고들어가는 내적 여정이다. 마지막 7궁방은 하느님이 현존해 계신 방이자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완전한 일치가 이뤄지는 방이다.

예수의 데레사

데레사 성녀(1515~1582)는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예수의 성녀 데레사’, ‘대(大) 데레사’ 등으로 불린다. 올해는 성녀가 태어난 지 500주년이 되는 해로, 세계 곳곳에서 성녀의 영성을 재조명하는 학술대회 등 다양한 행사들이 열리고 있다.

성녀는 가톨릭교회의 대표적인 신비가이자 교회학자로 인정받는 인물이다. 성녀가 선종한지 40년 후인 1622년 그레고리오 15세 교황은 그를 성인으로 선포했다. 1970년 바오로 6세 교황은 그를 ‘교회학자’로도 선포했다. 교회역사상 처음으로 여성 교회학자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신비신학과 신비생활의 기본으로 성녀가 강조한 것은 ‘하느님 없는 나는 무(無)요, 나에게 하느님은 전부’라는 사상이다. 어린 시절부터 성녀의 소원은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었다. 자연스럽게 그의 영성은 ‘나는 하느님을 뵙기를 원합니다’라는 원의에서 ‘나는 교회의 딸입니다’라는 응답으로 집약된다.

특히 데레사 성녀는 고난 받으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깊은 체험들을 통해 영적 여정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일대 회심을 하게 된 기회들이다. 이러한 신비체험을 통해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깨달은 성녀는 엄격한 봉쇄 수도원을 창설하게 된다. 이어 스페인 각지를 찾아다니며 직접 17개의 수도원을 세우고, 온전한 관상생활과 고행 등을 통해 교회에 생기를 불어넣고자 했다.

데레사 성녀가 세운 맨발 가르멜 수도회 회원들은 실제 한겨울에도 맨발로 생활한다. 신발을 벗는다는 것은 바로 세속의 수많은 욕구들을 떨쳐낸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강생 수녀원 안마당에는 십자가를 향해 가는 7궁방이 그려져 있다. 데레사 성녀는 신비체험에 따라 기도 단계를 7개 궁방으로 이뤄진 ‘영혼의 성’으로 설명했다.
데레사 성녀가 태어나 자란 생가(生家) 터에는 기념성당과 맨발 가르멜 수도원으로 구성된 ‘생가 성당’(라 산타, La Santa)이 자리하고 있다.
일반 순례객에 공개된 강생 수녀원 내부 고해소 모습. 수도자들은 두꺼운 창살 너머 봉쇄구역에서 작은 나무창을 열고 고해성사와 영적상담 등을 할 수 있다.
아빌라 성벽 정문 왼쪽에는 하늘을 바라보며 신비신학 작품들을 집필하는 데레사 성녀 성상이 세워져 있다.

스페인 아빌라 주정아 기자 (stella@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