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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한국가톨릭사목연구소 특별기획] ‘가정사목과 복음화’ 9. 자연법

박영호 기자
입력일 2015-06-30 수정일 2015-06-30 발행일 2015-07-05 제 2951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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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 결합·인공수정·낙태… 괜찮나요? 인간 본성에 위배되는데
생명 보존의 기준 되는 그리스도교 윤리 원천
세속·상대주의적 사고로 절대가치 거부하는 시대
혼인·성·출산 의미 퇴색
현 시대에도 수용 가능한 새로운 언어·논리 찾아야
지난해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제3차 임시총회를 위해 교황청은 각국 주교회의에 예비문서 설문을 보내 지역교회 사목현장에서의 경험과 사례들에 관한 답변을 요청했다.

혼인과 가정에 대한 다양한 설문들이 모두 9개 범주로 나눠 주어졌다. 그 중 하나가 ‘자연법에 따른 혼인’과 관련된 것들로 ‘자연법’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인정되고 수용되고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었다.

이에 대해 한국 주교회의가 작성한 답변서는 한국 사회가 유교적 개념을 토대로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이라는 자연법의 개념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답했다. 혼인은 이성간의 결합이고, 일부일처만이 용인된다는 점은 교회의 자연법에 따른 혼인의 개념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교회가 자연법의 개념을 바탕으로 설파하는 윤리와 도덕적 가르침이, 그러면 다른 사안들에서도 사회적 규범과 통념에 일치하고 있을까? 사실상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러하지 않다. 낙태를 비롯해, 교회가 제시하는 혼인과 가정, 성에 관련된 규범과 윤리 지침들은 세속주의, 쾌락주의, 개인주의, 오도된 여권 운동 등에 밀려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는 가르침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위에 언급한 답변서 역시 동성 결합을 받아들이지 않는 전체적 추세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에서도 이를 법적인 혼인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고 있음을 지적했다. 국제적으로는 이미 동성 결합에 대한 태도가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가장 최근에는 미국 연방법원에서 동성 결합이 합법적이라고 판결함으로써 사실상 법적으로도 전 미국의 동성 결합을 인정했다. 따라서 앞으로 한국 사회 안에서도 이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위기에 놓인 ‘자연법’, 새 언어·논리 모색해야

교회의 생명윤리 근간이 되는 ‘자연법’의 개념은 현대 사회와 세계 안에서 그 정당성과 가치가 점점 더 추락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깊은 위기감에서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제3차 임시총회 참석 주교들은 ‘자연법’ 개념을 현대인들에게 설득력 있는 방식과 내용으로 전달해야 할 필요성을 지적했다.

총회에 참석하고 돌아온 강우일 주교(제주교구장)는 가톨릭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교회는 생명의 잉태와 출산에 관련하여 ‘자연법’에 입각한 실천을 가르치지만, 현대인들 중에 자연법의 개념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극히 적다. 교회는 혼인과 성생활, 출산과 가족계획 등 생명과 관련한 가르침을 전할 때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새로운 언어와 논리를 찾아야 한다.”

현대인들이 귀 기울이고 기꺼이 수용하고 실천할 수 있는 가르침을 제시하기 위해서, 현재의 자연법 개념은 방법과 언어면에서 불충분할지도 모른다. 작년과 올해 연이어 열리는 세계주교대의원회의의 기본 노선이, 신자들의 일상 생활에 좀 더 밀착하고 현실을 정직하고 꼼꼼하게 살펴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려 한다는 점에서 ‘자연법’ 개념 자체를 반성해보려는 자세는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교회가 자연법 개념에 기초한 가르침과 전혀 다른 새로운 언어와 논리로 혼인과 가정에 대한 가르침을 대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주교들의 지적과 현실 상황은 적어도 가르침을 주는 어투와 태도, 논리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만큼 오늘날 혼인과 가정의 현실은 타개해야 할 많은 위기 상황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자연법과 성, 혼인, 가정, 그리고 생명윤리

‘자연법’은 성경과 함께 그리스도교 윤리의 근간을 이루는 원천이다.

“살인하지 말라”는 성경에 기록된 하느님 계명으로서 그리스도인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 존재는 하느님만이 갖고 있는 생명에 대한 권리를 임의로 행사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이다. 살인 금지는 동시에 인간 본성에 의해서 기초된 것이고, 인간 본성에 의해서 요구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살인하지 말라”는 원리는 자연법의 원리이다.

시대 상황과 조건에 의존하는 상대적 실정법과는 달리, 자연법은 인간 본성에 의거하는 것으로서 보편타당하고 항구불변하다. 독일의 법 철학자 에릭 볼프(Erik Wolf)는 자연법의 개념이 다양하지만 그 기능은 한 가지라며, “자연법은 항상 비판적으로 실정법의 불완전성을 깨우쳐 주는 등에의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한국가톨릭대사전은 자연법을 “모든 인간에게 공통으로 부여된 권리 또는 정의의 체계, 인간이 추구해야 할 선과 피해야 할 악에 관계하는 올바른 이성의 보편적 규칙이나 명령의 총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진남 교수(숙명여대 교양교육원)는 2010년 제6회 가톨릭생명윤리연구소 학술대회 ‘신학에서 본 자연법과 생명윤리’ 발제에서 생명윤리의 네 가지 분야들, 즉 생명의 근원(origin), 시작(commencement), 질(quality), 끝(termination)에서 자연법 개념이 연관되는 영역과 이슈들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첫째, 생명의 기원과 관련해 인간 생명의 기원은 하느님이고 인간은 하느님 형상대로 만들어졌기에 인공적으로 인간을 만들거나 인간 본성을 조작하려는 시도는 하느님의 능력과 권위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생명윤리의 이슈들로는 인간 복제 및 유전자 치료, 인공수정, 체외수정, 대리모 등이 있다.

둘째, 생명의 시작과 관련해서 교회는 부부간의 관계를 통해 정자와 난자가 결합하고 수정되는 순간 한 인간의 생명이 시작된다고 본다. 부부의 행위는 출산을 배제하지 않아야 자연법에 거스르지 않기 때문에 자연주기법을 이용한 모든 피임법은 도덕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 수정, 피임, 낙태와 같은 성윤리가 주요한 이슈들이다.

셋째, 생명의 질적인 면에 대한 것으로, 인간 생명은 단지 살아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기에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다. 유전적 난치병을 해결하고 불치병을 고치기 위해서 유전자 조작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대해 교회는 인간 생명의 질서를 파괴하기 때문에 윤리적으로 단죄한다. 유전자 조작, 장기 이식, 장기 매매나 특정 목적을 위해 배아를 생산하거나 폐기하는 것이 이에 해당된다.

넷째, 생명의 끝에 관한 것으로, 삶과 죽음의 경계와 기준에 대해 논의한다. 모든 존재는 선이고 생명은 신의 선물이고 생명의 보존은 자연법의 첫 번째 계명이다. 따라서 자기 생명을 지키기 위한 정당방위 이외의 어떤 살인도 단죄하기에 살인, 집단학살, 사형, 자살, 안락사 등은 모두 용납될 수 없다.

자연법은 ‘이성’으로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이성법’(한국가톨릭대사전)이다. 따라서 신앙 유무를 떠나서 보편타당하고 설득력 있는 가르침을 줄 수 있는 가르침의 원천이다. 혼인과 가정, 성과 생명에 대한 상대적이고 혼란스러운 각종 ‘주의’들을 넘어서 변하지 않는 진리를 설파해야 하는 교회에게 자연법의 개념은 가르침의 원천이다. 다만 지적되고 있듯이, 현대인들, 특히 상대주의적 사고가 당연시되고 개인과 주장의 다양성이 인정되고, 절대적 가치 자체를 거부하는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수용하고 알아들을 수 있는 새로운 방식과 언어가 요청된다고 하겠다.

박영호 기자 (young@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