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민족·화해·일치] 아, 꿈에 그리던 친구야! / 박주희

박주희 (체칠리아·뉴포커스 기자)
입력일 2015-05-20 수정일 2015-05-20 발행일 2015-05-24 제 2945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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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면서 수없이 반복되는 만남과 이별을 체험한다. 바쁜 일상에 묻혀 지나간 추억과 인연들을 잊고 사는 경우도 많지만, 가끔은 손목 잡고 뛰놀던 소꿉친구가 못 견디게 보고 싶은 순간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나에게는 마음씨 착하고 인정 많은 소꿉친구가 있었다. 어린 시절 늘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며 서로의 손목을 놓지 않고 다니던 그 친구. 부모님들도 다정한 우리 모습을 보며 “너희는 시집을 가도 한 마을에 가야겠다”고 농담처럼 말씀하셨다. 그렇게 우리의 우정은 이기심 없는 아름다운 마음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300만의 아사자가 속출한 ‘고난의 행군’은 행복했던 친구의 가정을 산산이 부수었다. 열악한 경제난에 시달리던 친구는 배고픔을 참지 못해 중국으로 팔려갔다. 그렇게 나는 소꿉놀이 시절 친구를 잃었다.

수십 년 세월이 흐른 뒤, 어느 날 우연히 친구의 소식을 알게 되었다. 지인이 보내온 한 장의 사진에서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은 짝꿍의 눈빛을  찾을 수 있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지만, 행복했던 순간들을 가슴 속에 새겨 준 친구의 추억과 기억만은 지울 수 없었다.

우리는 강산이 두 번도 넘게 변해버린 후에야 북한이 아닌 대한민국에서 만났다. 하지만 친구는 나와의 만남을 앞두고 심리적 불안과 함께 주저하는 마음을 표현했다. 나는 그의 소심한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고, “왜?”라는 의문을 품었다. 친구와의 만남을 기다리는 동안, 많은 사람으로 붐비는 지하철 역사 안에서 기억조차 희미한 친구가 지나갈까 봐 걱정이 앞섰다. 얼마 후 예쁜 아기를 등에 업은 친구가 멀리서부터 반갑게 소리쳤다. 순간 내 눈에서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십 대에 헤어진 둘도 없는 짝꿍이 마흔을 넘긴 중년의 모습으로 내 앞에 다가왔다. 그냥 말없이 안아주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상의 행동이었다.

그를 만나 오랜 시간 회포를 나누면서 친구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오래전에 당했던 북한에서의 힘든 생활과 그로 인해 깨어진 가정의 행복. 살길을 찾아 중국으로 갔지만, 공안에 의해 북송되었던 많고 많은 아픈 상처들. 새 가정을 이루면서 가슴 아픈 과거를 잊기 위해 이를 악물고 열심히 살아왔던 기억들. 하지만 그는 나와의 만남을 주저하고 힘들어 했다. 30년 만에 만난 나로 인해 가슴 속 깊은 곳에 묻었던 고향에 대한 아픈 기억을 또다시 파헤쳐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친구를 안아주며 이렇게 속삭였다. “우리가 받았던 상처는 너와 나의 잘못 때문이 아니야. 소중한 시절도 추억하기 싫을 만큼 우리를 아프게 한 북한 정권 때문이야. 그러니까 우리 자식들은 우리처럼 가슴에 아픈 상처를 남기지 않게 살게 해주자.”

신기하게도 그 친구도 천주교 신자다. 비록 오랜 세월 헤어져 살았지만, 천주교를 통해 마음을 다스리고 행복을 바라는 마음은 30년 전과 같았다. 우리의 만남은 단순한 인연이 아니라 이곳으로 불러주신 예수님의 사랑이 아니었을까.

박주희 (체칠리아·뉴포커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