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박물관 문화 순례] 공세리성지성당 박물관

오남주(젬마·공세리성지성당 박물관 학예사)
입력일 2015-04-21 수정일 2015-04-21 발행일 2015-04-26 제 2941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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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신앙의 아픔이 서려 있는 곳
충청 내포지방 교우촌 모습 선명
6·25 당시 인민군 박해 상황도 간직
성당은 충남 지정문화재 제144호
‘제대판목’에서는 초기 교회사 흔적
공세리성지성당 박물관 전경. 문화유산을 보존, 관리하는 박물관이 문화재(충청남도 지정문화재 제144회)가 된 특이한 경우다.
1890년 설립된 간양골본당을 전신으로 하는 충남 아산 공세리성지본당은 구 사제관(현 공세리성지성당 박물관)과 함께 충청남도 지정문화재 제144호다.

성당이 자리한 1만여 평의 부지는 조선 선조 때부터 충청도 일대에서 거두어들인 세곡을 저장하던 공세 창고가 있던 곳이다. 영조 38년(1762년) 폐창이 될 때까지 300년 정도 운영됐다. 공세리성지는 이곳에 부임한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에밀 드비즈 신부가 일명 ‘이명래 고약’으로 알려진 약을 처음 제조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박물관(관장 김수겸 신부)은 구 사제관을 개보수해 2008년 9월에 개관했다. 충청도 내포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초대교회 교우촌의 생활모습과 박해시기 순교자들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 순교한 성직자들의 모습을 간직한 유서 깊은 곳이다. 박물관 관람 시간은 화~일요일(월요일 휴무) 오전 10시~오후 4시까지, 입장마감은 오후 3시30분.

공세리성지성당은 2005년 한국관광공사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성당으로 선정했을 만큼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근현대사의 아픔도 서려 있는 곳이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인근 출신 순교자들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 순교성지이면서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들의 박해가 가해진 비극의 장소다. 당시 공세리에 쳐들어온 인민군은 박물관(당시 사제관)을 정치보위부로 삼고 성당을 기마부대의 본부로 삼았다. 이때 박물관과 성당에 보관 중이던 많은 성물들이 파괴되고 소실된 것은 한국교회사에서 큰 아픔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성물에 대한 신심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보존된 것들이 있으니 대표적인 것이 박물관에 들어서면 눈길을 끄는 제대판목이다. 이 제대판목에는 한국 천주교회사의 커다란 흐름이 담겨 있다.

이 유물은 1890년부터 공세리본당의 전신인 간양골본당(현 충남 예산군 예산읍)에서 실제 쓰던 것이다. 간양골은 초기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그대로 엿볼 수 있는 곳이다. 병인박해로 천주교회가 말살의 위기를 맞았지만 신자들이 숨어들어가 신앙을 이어가며 생활의 터전으로 삼았던 곳 가운데 하나가 바로 깊은 산 중턱의 간양골이었다. 박해 동안 천주교 신자들은 산속에서 화전을 일궈 농사를 짓거나 산나물을 채취하며 생활했고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이어나갔다. 초기 교우촌 신자들의 유일한 생계 방편은 옹기와 숯을 굽거나 담배와 조, 밀, 채소 등을 재배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옹기점이나 숯가마를 운영하는 신자들은 옹기와 숯을 팔러 다니면서 교회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었고, 다른 신자들과 빈번하게 만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교우들 간에 일종의 전령 역할도 수행했다.

1886년 조선-프랑스 수호 통상조약이 맺어짐으로써 그리스도교 신앙의 자유에 대한 암묵적인 승인을 받게 됐고, 1890년 전국에 9개 본당을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이 중 하나가 박해시대 때 신자들이 몰래 숨어 신앙생활을 유지해 왔던 간양골이었다. 그리고 간양골본당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파스키에 신부가 바로 이 제대판목에서 미사를 봉헌했다.

일설에 의하면 박해시대에는 눈에 띄는 장소에 고정된 제대를 설치해 놓을 수가 없었다. 평상시에는 선반으로 달아 두었다가 신부들이 공소를 돌며 미사를 드릴 때에 이동식 제대로 사용하기도 했기에 제대 대신에 판목을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 제대는 간양골본당 설립 초기에 ‘제대’의 용도로 따로 제작됐을 것으로 추측되며 한 차례 소실 위기를 겪기도 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 당시 반외세를 표방한 동학도 및 외교인들이 박해를 자행하기 위해 성당까지 파괴하려고 군수에게 허락을 받으려 했다. 천만다행으로 관찰사가 불허하면서 지금까지 남아있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만약 이때 성당이 파괴됐다면 초기 신자들의 역사와 신앙의 숨결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이듬해인 1895년 간양골본당의 관할 지역 중 일부였던 아산 공세리가 본당으로 창설되고 간양골본당이 공세리본당의 공소로 예속되면서 제대판목은 공세리로 옮겨졌다. 1896년 홍콩에서 구입한 제대를 쓰기 시작하면서 이 제대판목은 지금의 공세리성지성당 박물관에 마지막 안식처를 마련하기에 이르렀다. 초기 한국교회 역사의 흔적을 생생히 느낄 수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문의 041-533-8181 공세리성지본당

공세리성지성당은 2005년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성당이다.
간양골본당에서 사용되다 현재 공세리성지성당 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제대판목.

오남주(젬마·공세리성지성당 박물관 학예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