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쉽게 풀어쓰는 영신수련] (16) 복음관상기도의 예 중 하나

유시찬 신부(예수회)
입력일 2015-04-14 수정일 2015-04-14 발행일 2015-04-19 제 2940호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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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인 복음관상기도의 예를 하나 들어 보면 이해하기가 좀 더 수월할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제 체험입니다. 신부가 되고 나서 몇 년 지난 뒤 최종서원을 앞두고 한 달 영신수련 피정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 기도했던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을 관상했던 체험입니다. 먼저 나자렛을 떠나시는 장면부터 봤는데 성모님과의 이별 같은 곳에서는 별다른 느낌이 없었습니다. 그 후 요르단 강까지 가시는 여행길을 살펴봤는데 거기서도 별다른 것은 없었습니다. 그냥 짧은 시간에 수월하게 요르단 강까지 쑥 가 버린 것입니다.

그다음 요르단 강 주변을 보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이 어떻게 모여들고 있나 하고 살펴봤습니다. 그랬더니 떠오른 이미지가 군데군데 사람들이 무리 지어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있는데 자연스레 떠오른 생각은, 예수님께서 아무 데나 털퍼덕털퍼덕 앉으시면서 사람들 사이에 섞여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시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저로선 이 이미지부터가 예사롭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저의 평소 모습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렇게 스스럼없이 아무 데나 편안하게 앉고 대화에 끼어들고 하는 성격이 아닌 것입니다.

이어서 보는 건, 그렇게 모여 있는 사람들의 무리가 어떤 무리는 이미 세례를 받은 무리들이고 어떤 무리는 세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제게 인상적으로 떠오른 생각이 하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느 무리의 사람들 사이에 끼어 있었는데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들이 이젠 자기들 차례가 되었다고 세례 받으러 가자면서 일어서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 곁에 앉아 있던 어떤 여자가 일어서며 예수님 손목을 잡고 일으켜 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 당신은 세례 안 받아요? 우리랑 같이 세례 받아요’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손목이 잡힌 채 엉거주춤 일어서시면서 ‘그래, 나도 이 사람들하고 같이 세례 받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 장면이 제게 강렬한 인상을 가지고 다가온 것은 틀이 없는 예수님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제가 관상하고 있는 장면 속에선, 예수님은 미리 짜 놓은 계획 같은 것이 있고 그것을 강한 의지로 실천해 나가시는 그런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매 순간 아주 맑게 깨어 계신 가운데 그때그때 상황을 보시고 그 상황에 따라 움직이시는 것이었습니다. 세례를 받고, 광야에 가서 시험 기간을 거치고, 그리곤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하느님 나라를 전한다는 식의 계획을 먼저 세우시고 실행해 나가시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요르단 강에서 함께 이야기 나누던 사람들 서리에서 그들의 움직임을 보시며, 그들과 함께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그들 속으로 들어가고자 하시고 그들과 하나가 되고자 하시는 모습이, 제가 관상 기도를 통해 본 예수님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 점은 제게 상당한 도전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규범적인 성향이 강하고 그만큼 많은 틀을 스스로 만들어 놓고 그 틀 안에서 계획적으로 움직이는 기질이 두드러졌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복음관상기도를 통해 어느 장면에 가선 자신이 생각지도 않았던 어떤 생각이나 이미지들이 떠오르면서 자신의 모습을 비춰 주게 되고, 순간적인 그 과정을 통해 자신 안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 지점이 복음관상기도의 초점이라고 보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변화시켜 예수님 닮은 모습으로 바꿔 내기 위해 이런 식으로 움직이십니다.

자신과는 다른, 때론 정반대의,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만듦으로써 에고에 사로잡힌 우리를 해방시키시고 치유하시고 변화시키시어 당신 닮은 이로 바꾸시는 것입니다. 복음관상기도의 자연스런 흐름을 통해.

1997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수원 말씀의 집 원장, 서강대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순천 예수회영성센터 피정지도 사제로 활동 중이다.

유시찬 신부(예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