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현대 그리스도교 미술 산책] (28·끝) 지거 쾨더와 ‘아멘!

조수정(미술사학자)
입력일 2015-03-24 수정일 2015-03-24 발행일 2015-03-29 제 2937호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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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부당하고 기진한 채, 굵은 목재에 짓눌린 예수

채찍질하는 군인 흥분하는 군중도 없는
절반 이상의 텅 빈 공간, 현대인 무관심 상징
끝내 다시 일어나게 될 역설적 희망도 제시
「하느님의 어리석음-십자가의 여정·빛으로 가는 길」이라는 책에 실린 지거 쾨더의 작품 ‘아멘!’, Pauline Books & Media, 2000.

지거 쾨더(Sieger K&oumlder, 1925~2015)는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독일의 사제 화가이다. 벌써 십여 년 전, 「하느님의 어리석음」이라는 제목의 묵상집을 통해 독특하고도 깊은 울림을 지닌 그의 작품들이 우리나라에 소개된 바 있다. 강렬한 색채와 다소 투박하고 직설적인 묘사는 그를 독일 표현주의 계열의 화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하지만, 다른 화가들의 작품에서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신학적 통찰력과 명상적 분위기는 사제로서 화가의 길을 걸었던 그의 삶에 기인한다.

독일 남서부 슈바벤 지역의 작은 도시, 바서알핑엔(Wasseralfingen)에서 태어난 그는 슈베비슈 그뮌트(Schw&aumlbisch Gm&uumlnd) 국립공예학교에서 조각과 금속디자인, 그리고 슈투트가르트(stuttgart)의 예술학교에서 미술과 예술사를 배웠고, 튀빙겐 대학에서는 영어영문학을 공부하였다. 이후 그는 작가이자 미술교사로 오랫동안 일하였는데, 마흔 살이 다 되었을 무렵 갑자기 삶의 진로를 바꾸어 새로 신학공부를 하였다. 그리고 6년간의 신학교 생활을 마친 뒤 1971년에 사제서품을 받아 마침내 교구 사제로서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사제 화가가 된 지거 쾨더는 유화, 판화, 색유리화, 모자이크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을 제작하였고, 자신의 그림으로 엮은 성경과 묵상집 등의 출판물을 보급함으로써, 그림과 대중매체를 통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사람들을 감화시키는 특별한 소명에 충실히 응답하는 삶을 살았다. 은퇴 후 엘방엔(Ellwangen)에 머물던 지거 쾨더 신부는 지난 2월 9일 영원하신 주님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이제는 지거 쾨더 신부의 새로운 작품을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되었지만, 그가 우리에게 남긴 훌륭한 그림들은 여전히 새로운 감동을 전해주고 있다.

‘아멘!’은 2000년도에 출간된 「하느님의 어리석음-십자가의 여정·빛으로 가는 길」(The Folly of God- A Journey of the Cross A Path to Light)이라는 책에 실린 작품이다. 삽화로 넣은 지거 쾨더 신부의 그림에 대하여 리나 리시타노(Rina Risitano, fsp)가 묵상글을 썼다.

온 세상의 무게! / 흙먼지 길에서 내리누르네. / 거부당하고, / 기진한 채, / 굵은 목재가 그분의 목을 짓누르니- / 덫에 걸린 쥐처럼 꼼짝달싹 못하시네!

이렇게 쓰러진 뒤, / 누가 다시 일어날 수 있는가? /

지거 쾨더 신부가 그린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우리를 당황케 한다. 예수님께서 상처투성이 몸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 기진하여 쓰러지시는 모습을 그린 그림들을 많이 보아왔어도, 이렇게 굵고 무거운 십자가 나무에 깔려 아주 납작하게 땅바닥에 머리를 대고 있는 모습은 아마 처음 보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목재의 무게가 얼마나 대단한지, 예수님의 몸은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기존의 그림들과는 전혀 다른 이러한 파격적인 구성은 어찌 보면 예수님께 무례한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예수님을 이 지경으로 쓰러뜨린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를 곰곰이 생각하는 사순시기의 묵상으로 우리 각자를 인도한다. 이웃과 화해하지 못하고 불신과 증오, 급기야 전쟁으로까지 치닫고 있는 우리 세대의 모습은 예수님의 목을 짓누르는 저 무거운 목재보다 더한 것이 아닐까.

‘아멘!’이라는 작품이 우리에게 생소하게 느껴지는 또 다른 이유는 예수님의 주위에 채찍질하는 군인이나 흥분한 군중이 단 한 명도 없다는 데 있다. 흐느끼는 여인은커녕 개미새끼 한 마리조차 보이지 않는다. 화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텅 빈 공간의 짙푸른 하늘에는 희멀건 달만 덩그렇게 떠있을 뿐이다. 예수님을 짓누르는 이 허공의 실체는 무엇일까를 생각해본다. 소리조차 낼 수 없게 만드는 그 거대한 무게는 바로 현대인의 무관심은 아닐까? 통곡과 아우성이 없는 침묵의 십자가의 길을 예수님께서 홀로 걷고 계셨다는 생각에 손발이 오그라든다.

하지만 이 그림이 의미를 갖는 진정한 이유는 우리에게 역설적인 희망을 주기 때문이다. 이 그림에서 보듯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깔려 가망 없이 쓰러지셨지만, 끝내 다시 일어나 당신의 길을 가셨다. 존재 자체를 무너뜨리는 광폭한 힘에도 불구하고 ‘아멘’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무한한 신뢰와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 십자가 밑에 납작 깔린 예수님의 모습은, 무릎에 힘을 주고 다시 일어서야 할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조수정(미술사학자)

프랑스 파리1대학에서 미술사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번 호로 연재를 마칩니다. 수고해 주신 최정선 선생님, 조수정 교수님과 독자들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조수정(미술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