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 2. 우리 시대 가난의 모습

오혜민 기자
입력일 2015-02-24 수정일 2015-02-24 발행일 2015-03-01 제 2933호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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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계 해결돼도 고통은 계속… ‘구조적 가난’ 극복해야
성장 중심 경제정책 영향으로 상대적 빈곤 문제 심각
교황, 물질적 도움보다 내면 아픔 어루만질 것 강조
“가난한 이들 위한 교회 쇄신은 복음의 긴급한 요청”
이제 사회는 가난한 사람들이 행복하기 어려운 곳이 됐다. 기본적 생계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요구는 충족시켰더라도 개인의 경제적 삶은 여전히 팍팍하다. 그것을 대표하는 우리 세대의 단어들이 있다. ‘삼포세대, 노동시간 1위, 자살률 1위’. 고도성장을 이루는 사회에서 가난의 의미는 계속해서 확대된다. 교회가 현대사회 안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라는 사도시대의 이상을 이루기 쉽지 않은 이유다.

절대빈곤과 신자유주의

그리스도인이 가난에 대해 성찰해보아야 하는 이유는 하느님의 선물인 ‘복음’의 기쁨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게 저해하는 요소가 오늘날 가난의 배경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사도적 권고 「복음의 기쁨」을 통해 “오늘날 세상의 가장 큰 위험은 온갖 극심한 소비주의와 더불어 개인주의적 불행”이라며 “이는 안이하고 탐욕스러운 마음과 피상적인 쾌락에 대한 집착과 고립된 정신에서 생겨난다”고 지적한다(2항).

오래 전 세대 사람들의 삶의 목표가 오로지 배고픔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확연히 달라진 가난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다. 세계 현대사회의 흐름 안에서 복잡다단해진 가난의 모습은 신자유주의에서 그 배경을 찾을 수 있다.

「복음의 기쁨」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직접적으로 신자유주의를 언급하지는 않지만, ‘배척과 불평등의 경제는 안 된다’(53항), ‘자유시장으로 부추겨진 경제성장’(54항), ‘눈에 보이지 않고 때로는 가상으로 존재하는 새로운 독재’(56항) 등으로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비판했다.

신자유주의란 국가권력의 시장 개입을 비판하고, 시장의 기능과 민간의 자유로운 활동을 중시하는 일종의 경제적 자유방임주의 이론이다. 문제는 오늘날 주류를 이루는 과도한 ‘성장 중심의 경제정책’이 세계를 지배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처럼 작용하면서, 효율과 이윤을 창출하는 것에만 급급할 뿐 인간성은 말살한다는데 있다.

박문수 신부(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소장)는 “새로운 현상의 가난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의 경제적 흐름을 이해해야 한다”며 “부(富)에 대한 열망이 강해지면서 오늘날 사회는 신자유주의를 선택했고 그 부작용이 속속들이 드러나고 있다”고 말했다.

성경에서도 가난한 이들은 계속해서 등장해왔다. ‘가난’이라는 명제는 이처럼 오래 전부터 존재해왔지만, 대부분이 가난했던 예전과 달리 오늘날 가난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가난의 양상 또한 ‘먹고 사는 문제’인 절대적 빈곤에서 벗어나 더욱 복잡해졌다. 나아가 상대적 무관심과 물질주의, 소비주의, 세속화, 상대주의, 개인주의 등 교회가 도전해야 할 수많은 과제들을 낳았다.

우리 시대의 가난

현대사회 안에서 사람들은 노동을 하면서도 여전히 가난하다. 이농현상을 통한 도시빈민, 인건비를 줄이기 위한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문제, 가정을 이끌어나가기 위한 맞벌이 부부와 양육의 어려움, 솟구치는 주택시장의 논리 앞에서 전·월세와 임대주택 등으로 분리되는 사람들의 모습은 오늘날 가난의 한 가지 형태다.

성장 중심의 경제정책은 세계적으로도 ‘이주민 문제’라는 가난의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냈다. 이주노동자들은 가난을 탈피하기 위해 가족을 떠났지만 가족과 갈라져 살면서 더 많은 부작용을 안고 산다. 가장이 떠난 자리에 질병과 이혼, 사고 등이 더해져 한부모와 조손가정의 문제는 ‘가족 혼란현상’의 대표적 사례가 된지 오래다.

오늘날 경제 성장은 이처럼 먹고 살기 위한 기본적 순환경제의 모습이 아닌, ‘성장’을 위한 성장의 모습을 하고 있다. 경쟁에서 뒤쳐진 가난한 이들을 위한 안전망이 구축되고 있지만, 이 또한 수량화되고 계량화돼 사람들을 등급으로 나눈다. 복지혜택을 기다리는 사람들조차 서로 경쟁을 해야 하고, 때로는 자신의 차례를 앞당기기 위해 서류를 조작하는 일도 서슴지 않게 되는 것이다. ‘구조적 가난’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셈이다.

곽승룡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총장)는 지난해 10월 열린 ‘교황 방한 후속 심포지엄’에서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고 좋은 일이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는 않고 인간 증진이라는 분야에서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줄 것을 교황은 격려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난한 이를 물질적으로 돕는 ‘자선’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인간적 성장’을 도와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는 절대빈곤의 배고픔보다도 상대빈곤의 정신적 상처를 안고 사는 오늘날 가난한 이들의 아픔을 제대로 어루만지기 위함이다.

박문수 신부는 “다른 집 아이가 값비싼 제품을 샀을 때 가난한 이들도 생활비를 털어 그 제품을 사주려는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며 “절대빈곤과 상대빈곤 등 양쪽으로 시달리는 오늘날 가난한 이들이 오히려 소비주의와 마주할 일이 더 많다”고 전했다.

현대사회의 주류를 이루는 과도한 성장 중심 경제정책으로 사람들은 새로운 가난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2012년 9월 수원교구 공동선실현사제연대가 마련한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의 삶을 위한 미사’.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

교황은 “가난한 이들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한, 이 세상의 문제들, 또는 이와 관련된 문제들에 대한 어떠한 해결책도 얻지 못할 것”(202항)이라고 말하며 가난의 구조적 원인을 해결해야 하는 당위성에 대해 강조한다.

이재룡 신부(서울 혜화동본당 주임)는 ‘교황 방한 후속 심포지엄’에서 “교황이 요구하는 것은 시장과 금융 투기의 절대적 자율성을 거부함으로써 가난의 구조적 원인들을 제거하라는 것”이라며 “불평등을 사회 병폐의 뿌리라고 진단하고 있는 교황의 해법은 분명하다”고 전했다.

더불어 ‘가난한 이들의 교회’(198항)는 가난하며 가난한 이들의 해방자인 나자렛 예수(루카 4,18-19)를 본받는 교회라고 정의했다. 가난한 이들, 밀려난 이들, 배척된 이들의 교회가 아니라면 진정한 가톨릭교회가 아니라는 뜻이다.

세상과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서도 빈부격차와 가난은 여전히 존재한다. 교회 안에서 위로를 찾아야 할 가난한 이들은 생업에 종사하거나, 교회의 문턱이 높아서이거나 다양한 이유로 교회를 찾지 못하고 중산층 신자들이 교회의 주류를 이룬다. 교황의 지적대로 내적 생활이 자기 자신의 이해와 관심에만 갇혀 있을 때, 더 이상 다른 이들을 위한 자리가 없어 가난한 이들이 들어오지 못한다(2항).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쇄신은 복음의 긴급한 요청인 것이다. 박문수 신부는 이러한 요청 가운데 가난한 이들에 대한 환대와 연대, 성직자 쇄신 등을 교회 쇄신의 열쇠로 꼽았다.

그는 “교회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자선사업에 그치지 않고 가난의 구조적 변화가 이뤄지도록 함께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가난의 경험을 알고 기쁨의 삶을 사는 성직자들의 실천적 자세 또한 필요하다”고 말했다.

교회 구성원 모두가 연대해 오늘날의 구조적 가난에 대해 바로 알고 이에 대한 심리적 압력을 적극적으로 극복할 때, 진정한 ‘복음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은 가난한 이들을 통해 우리 자신이 복음화되도록 해야 한다. 새로운 복음화는 가난한 이들의 삶에 미치는 구원의 힘을 깨닫고 그들을 교회 여정의 중심으로 삼으라는 초대다(198항).

오혜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