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신나고 힘나는 신앙-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해설] (105) 성경 안에서 만나는 기도의 달인 (22) - 하느님을 모르는 세대 : 판관시대

차동엽 신부 (미래사목연구소 소장)
입력일 2015-02-10 수정일 2015-02-10 발행일 2015-02-15 제 2932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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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잃는 것은… 인생을, 모든 가능성을 잃는 것
■ 화근

가나안 정착은 미완인 채로 수습되었다. 여호수아기 말미와 판관기 초입에는 이스라엘 12지파가 각각 가나안 땅을 배당받을 때 미처 몰아내지 못한 민족들 목록이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대부분 역부족이나 관용 또는 타협에서 비롯된 미봉책의 수혜자들이었지만, 훗날 두고두고 우상숭배의 화근으로 작용했다. 이와 관련하여 야훼의 천사가 ‘보킴’이라는 지역에서 전한 메시지는 명료하다.

“나는 너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왔다. 그리고 이렇게 너희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데리고 들어왔다. 그때에 내가 말하였다. ‘나는 너희와 맺은 계약을 영원히 깨뜨리지 않겠다. 그러니 너희는 이 땅의 주민들과 계약을 맺지 말고 그들의 제단들을 허물어 버려야 한다.’ 그런데 너희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너희가 어찌 이럴 수 있느냐? 그러므로 내가 말해 둔다. ‘나는 그들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않겠다. 그리하여 그들은 너희의 적대자가 되고 그 신들은 너희에게 올가미가 될 것이다’”(판관 2,1-3).

이 말씀을 온전히 알아들으려면 ‘우상숭배’에 대한 하느님의 관점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성경에서 ‘잔인하다’ 싶을 정도의 비관용이 언급되고 있는 대목을 보면 이는 거의 대부분 우상숭배의 죄와 관련이 있다. 그만큼 하느님은 배타적으로 엄정하시다. “너에게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탈출 20,3)가 제1계명, 바꿔 말하여 가장 중요한 계명임을 놓치지 말 일이다. “왜 그러실까? 속 좁게 시리.” 혹자는 이렇게 반감을 표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상’은 속이 좁고 넓고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바로 우상이 생명을 죽이는 ‘독’이기 까닭이다.

그러한데 이스라엘 12지파는 우상을 섬겨왔던 가나안 원주민이 자신들이 정착한 지역에 섞여 살도록 대인배인양 허용했다는 것이다. 이에 야훼의 천사는 이들이 오래지않아 이스라엘 백성에게 치명적인 ‘올무’가 될 것임을 저렇게 엄중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는 판관기 전체의 복선으로 작용한다.

■ 비극의 시작

판관기 저변을 흐르는 복선 하나가 방금 밝혀진 셈이다. 그 두 번째가 바로 ‘하느님을 모르는 세대’다. 판관 시대는 실제적으로 이들의 출현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판관기 전체의 사실상 대전제가 되고 있는 것이 다음의 문장이다.

“그의 세대 사람들도 모두 조상들 곁으로 갔다. 그 뒤로 주님도 알지 못하고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업적도 알지 못하는 다른 세대가 나왔다”(판관 2,10).

이제 가나안 정착을 마무리한 세대는 모두 세상을 떠났다. 머지않아 ‘다른’ 세대가 나왔다. 그들은 ‘주님도’, ‘주님의 업적’도 모르는 세대였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이는 이 세대에게 하느님에 대한 경험적 지식이 없다는 얘기다. 성경에서 ‘안다’는 것은 경험적 지식을 가리킨다. 어찌 귀동냥 정도야 없었겠는가. 그것은 참 앎이 아니었다.

이는 드라마틱하게 신앙체험을 한 조상 세대의 그것과는 대조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들은 하느님의 위대하신 역사(役事)를 경험했다. 그들은 역경 속에서 그들을 도우시는 하느님의 권능과 손길을 체험했다. 이것이 1세대의 신앙체험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약발이 시들어갔다. 그리하여 ‘야훼 하느님’은 그들에게 단지 소문 속의 하느님일 뿐 더 이상 자신들의 하느님이 아니었다. 그들은 사도 바오로의 표현처럼 “겉으로는 신심이 있는 체하여도 신심의 힘은 부정”(2티모 3,5) 하는 세대였던 것이다. 이것이 전환기의 비극이었다. 비극의 시작! 아마도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은 없을 것이다.

“하느님 없대요. 십계명 디스(diss)한대요. 성당 싫대요.”

“도무지 기도를 안 하려고 해요. 애들 땜에 속상해 죽겠어요.”

“종교는 자유니까 간섭 말래요. 더 끌리는 데가 있대요.”

이보다 더 큰 비극은 없다.

하느님을 잃는 것은 인생을 잃는 것.

아니 모든 가능성을 잃는 것.

존재의 기반(基盤)을 내동댕이쳤는데, 산들 무슨 의미 맺힐꼬.

스스로 원천(源泉)을 떴는데, 무엇으로 생동력과 지혜를 충당할꼬.

아무리 대안을 궁굴려 봐도 도통 답이 안 나오는 파국이다.

■ 우상의 매력

판관기의 내용은 ‘주님을 모르는 세대’가 가나안 원주민이 믿던 ‘우상’을 숭배한 징벌로 외적의 침공에 시달리다가 극적으로 판관들에 의해 구제되는 패턴의 반복적인 악순환을 담고 있다.

이 악순환의 단초가 되고 있는 것은 ‘반복된’ 우상숭배다. 앞에서 언급된 우상의 ‘올가미’(판관 2,3)는 참으로 징그럽게 ‘거듭’ 작동된다. 이에 대해 우리는 다음과 같이 쉽게 말할 수 있다.

“거 바보들 아니야? 아니 한 번 혼나면 됐지. 또 혼나고 또 혼나고….”

정녕 그들은 왜 그렇게 혼쭐이 나고도 다시 바알 신 또는 그의 부인인 아스타롯 신에 빠졌을까? 야훼 하느님이 그렇게 좋으신 분인 줄 체험했으면서 왜 자꾸 이런 일이 발생할까? 그 까닭이 없는 게 아니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본디 반유목민이었다. 조상들도 그랬고 그들 자신에게도 40년 광야생활을 하면서 유목민 유전인자가 되살아났다.

그런데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니, 가나안 농경문화가 있었다. 이스라엘인들은 일단 땅을 차지하기는 했는데, 씨를 언제 뿌려야 되는지 어떻게 키우고 언제 거둬야 하는지 아는 게 없었다. 그런데 그곳 사람들은 잘 안다. 그래서 그들에게 가서 물어보는 것이다.

“농사를 지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농사? 가르쳐 줘? 그러면 우선 고시래를 해. 푸닥거리면 더 좋고! 그러면 기가 막혀. 풍산(豐産)의 바알 신이 때마다 비를 내려주시고 풍작과 풍요를 누리게 해 주시고, 다산을 주셔. 이분을 잘 모셔.”

이런 그럴듯한 코치에, 아직도 정보가 부족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혹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믿어왔던 야훼는 누구고, 바알은 누구지? 아스타롯은 누구지?”

여기서 정체성이 헷갈린다. 이 중에서도 분별력이 있는 이는 “저거는 가짜고 이거는 진짜다”라며 유일신론으로 가는데, 분별력이 없는 이들은 다신론으로 가버린다.

“이 신도 맞고, 저 신도 맞구나.”

주목할 것은 이들이 야훼를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야훼 하느님은 전쟁을 치를 때 부르고, 농사지을 때는 바알한테 가서 빌겠다는 심산이었다. 처음에는 교육이 잘되어 있어서, “안 돼, 안 돼, 안 돼” 하다가, 시간이 흘러가다 보니 “왜 안 돼? 둘 다 맞는 거 아냐?” 이렇게 되어 버린다. 그래서 양다리를 걸치게 된다. 이에 대하여 나중에 열왕기 상권에서 엘리야 예언자는 이런 주문을 한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다리를 걸치고 절뚝거릴 작정입니까? 주님께서 하느님이시라면 그분을 따르고 바알이 하느님이라면 그를 따르십시오”(1열왕 18,21).

더 이상 양다리 걸치지 말고, 선택을 하라는 것이었다. 온전히 맡기라는 것이었다.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차동엽 신부 (미래사목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