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주의 창

[방주의 창] 농부의 겨울 / 이홍재

이홍재(치릴로·가톨릭농민회 안동교구연합회 부회장)
입력일 2014-12-16 수정일 2014-12-16 발행일 2014-12-25 제 2924호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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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겨울 첫 눈이 내려 창밖으로 온 천지가 하얗습니다. 집을 내려가는 초입 비탈길에는 밤새 먹이를 찾아 오간 고라니를 비롯한 산짐승들과 새들이 남긴 크고 작은 발자국들이 사방으로 분주합니다. 우체통에 매달린 모이 접시에도 한 줌의 싸라기를 올려놓아야 하는 계절이 왔습니다. 이름 모르는 부부 새가 제 밥그릇인 양 그 주변을 분주히 오르내리는 모습을 보면 제가 무심했던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합니다. 아직 오지는 않았지만, 지렁이를 찾느라 전 과수원을 뒤집어 놓았던 그 멧돼지 가족이 올해는 여기까지 내려오는 수고로움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앞마당에는 이것저것 가을의 잔재가 아직도 남아 있어 겨울을 맞을 채비가 끝나지 않았지만, 인간의 자잘한 일상사를 눈으로 하얗게 덮어 버림으로써 올해 농사일을 마무리하게 하였습니다. 물론 포도나무 가지 전정이라든지 밑거름 주는 일은 겨울 내 해야 하는 일이라 눈이 내리는 것이 반가울 수만은 없지만, 마음속으로 은근히 첫 눈이 내리기를 그렇게 바랐듯이 오늘 하지 못한 일들은 내일로 미루고 아침 늦게까지 늦잠 자는 행복을 가져봅니다.

겨울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계절인 것 같습니다. 지금쯤이면 으레 생각나는 것이, 내가 그때 무언가에 홀리듯 터무니없었던 귀농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하는 질문입니다. 마치 어느 시인의 두 갈래 길처럼 가보지 못하였던 그 길이 몹시 궁금하기도 하지만, 편안한 도시에서 계속 살았다면 땀 흘리며 열심히 일한 후 찾아오는 지금과 같은 평화를 느끼기는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회사 생활을 할 때에는 해보고 싶었던 일을 하지 못하고 일생을 마치면 스스로 불쌍할 것 같다는 생각에 무작정 가족들을 데리고 산골로 내려와서 옆지기와 함께 좌충우돌 포도농사를 한 지도 12년이나 되었습니다. 아직도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지만,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저를 인도하고 제 옆을 지켜주신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느낍니다.

또한 겨울은 지난 일 년을 돌아보고 다가올 내년을 설계하면서 힘을 충전하는 안식의 계절이기도 합니다. 농부는 지난 일 년 동안 봄, 여름을 거쳐 가을까지 한 치의 어김없이 진행되는 하늘의 일정표에 따라 종종걸음으로 열심히 달려 왔습니다. 나의 일정표만 챙기며 나만을 생각할 줄 알았던 습관도 농부가 되어 농사를 지으면서 하늘의 일정표에 맞출 줄 알게 되었습니다.

이상기후와 같이 농민에게 큰 고통을 가져오는 것도 하늘의 일정표에는 있는 모양입니다. 날로 심하여지는 천재지변을 농민들은 온몸과 마음으로 부대끼며 하늘을 쳐다봅니다. 물론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기에 ‘농사는 하늘이 지어준다’는 말로 위안을 삼기도 하지만, 그 피해가 엄정하기에 인간의 유약함과 한계를 몸소 느끼며 하느님에 대한 경외심을 배웁니다.

겨울은 친교의 계절이기도 합니다. 농한기로 미루어 놓았던 각종 영농교육을 비롯하여 요가 교실에서부터 서예학당, 마을회관에서의 목로주점까지 바쁘지만, 자발적 참여로 진행되는 여러 프로그램과 친교모임으로 한사람이 직함 서너 개로는 능히 모자라는 시간입니다.

지상파 방송과 일간신문에 묻어오는 세간의 흉흉한 소식이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요즘입니다. 온갖 험악한 세상 이야기에도 아름다운 세상만을 보게 하시는 주님. 빵 한 조각에도 배부르게 하고, 물질적인 욕망으로부터 나를 자유롭게 함으로써 농부의 자존감을 지킬 수 있도록 하느님께 기도하게 하는 계절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

이홍재(치릴로·가톨릭농민회 안동교구연합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