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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옛것과 새것 / 박영호 취재1팀장

박영호 취재1팀장
입력일 2014-12-16 수정일 2014-12-16 발행일 2014-12-25 제 2924호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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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이고 새해다. 교회력으로야 대림시기에 들어서며 새해가 시작됐지만, 1월부터 12월까지를 한 단위로 치는 이른바 회계년도에 익숙한 평범한 신앙인들은 성탄절의 흥청망청을 지나고, TV 앞에서 거꾸로 세는 숫자를 거쳐 재야의 종소리를 들어야 비로소 한 해가 시작된다. 연속 선상의 한 시점의 전환이 뭐가 그리 대수겠는가마는, 마음가짐은 분명 12월 30일 자정과 31일 자정이 다르다. 물리적인 표식을 하고서 그것을 지나야 뭔가 새로운 것이 시작된다는 느낌이 ‘훅’ 들어오는 세속적인 ‘성사적’ 특성이, 육체로 만들어진 인간의 한계이다. 원래 그렇게 생겨 먹었기 때문에 굳이 탓할 일은 없다.

31일과 1일이 이어지는 그 시점에서 항상 떠오르는 옛말이 있다. 송구영신(送舊迎新)과 온고지신(溫故知新)이다.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다”, 그리고 “옛 것을 배워 새 것을 안다”는 당연한 뜻이 1년 중 오직 그때에만 의미가 짙어지는 이유는 여전히 게으른 탓이다.

전자의 옛말은 지난 일을 팽개치라는 말로 받아들여지고, 후자의 옛것은 새것을 창출해내는 바탕이기에 어쩌면 두 옛말은 대칭인 듯 싶다. 하지만 사실은 내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송구영신은 관가에서 구관(舊官)을 보내고 신관(新官)을 맞은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새 관리가 오면 관가는 새 기풍으로 일신한다. 그러기에 지난해에 모자랐던 것들을 새해에는 채울 수 있도록 새 기풍을 다짐하는 것이 송구영신의 메시지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온고지신의 덕목을 필요로 한다. 지난 시간을 반성하고 올 시간에는 그러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 온고지신이 가르치는 바이다. 성공이든 실패든, 옛것으로부터 교훈을 얻어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지식과 인식, 새 시도를 도모하려는 것이다. 역사를 궁구하고 배우는 이유 역시 거기에 있지 않은가.

올 한 해 그 숱한 참담함은 팽개치고 갈 일이긴 하다. 세월호 참사가 준 절망과 좌절은 매어 있지 말고 떨치고 갈 옛것이다. 하지만, 그 교훈은 또 다른 한 해를 바로잡아 갈 지표다. 송구영신인 동시에 온고지신의 대상과 기억이 바로 세월호가 아닐까.

범국민적인 좌절 속에서 맞이한 교황 프란치스코, 울부짖는 이스라엘을 출애굽시켰던 야훼의 손길처럼 우리 민족을 절망의 구렁텅이 속에서도 희망을 품게 해주었다. 보수든 진보든 어떤 정치적, 이념적 명분 조차도 무의미하게 했던 교황이 세월호 유가족들을 만난 이유는 그저 그들의 고통이었다. 사회교리의 힘도 아니었고, 시대를 앞서간 진보의 논리도 아니었다. 힘들고 서러운 하느님 백성 여러 명에 대한 자비’의 시선과 손길이었을 따름이다.

그 자비는 올해 주교 시노드에서 논의했고, 내년 시노드에서도 논의할 ‘가정’과 생명 문제를 접근하는 지침이다. 말 안 듣는 학생들을 엄하게 훈육하는 학생주임 선생님의 기풍보다는, 방황하는 내 자식을 함께 아파하면서 품으려는 어버이의 품격이 교황님께서 보여주신 기풍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추진하는 교회 쇄신의 모양새 역시 송구영신과 온고지신이다. 낡은 교회 행정으로부터 예수님의 참 목자들의 ‘사목’으로의 전환은 첫째, 복음과 예수의 가르침에 비추어, 복음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은 결연하게 버려야 한다는 촉구이고, 둘째 가장 옛것인 예수님과 사도들, 초대교회의 모범으로부터 우리가 배워야 할 것들이라는 의미에서이다.

이스라엘이 출애굽의 ‘원체험’으로부터 하느님의 자비의 손길을 끊임없이 곱씹고 하느님에서 멀어진 자신들의 구태를 쇄신하려 했듯이,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와 세례의 체험을 통해 세속의 가치를 떨치고 복음의 가치를 회복하려는 부단한 자기 혁신의 송구영신과 온고지신을 실천해야 할 것이다. 대체로 작심삼일이더라도.

박영호 취재1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