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

22회 대산문학상 번역부문 수상 르브렝 수녀

김근영 기자
입력일 2014-11-25 수정일 2014-11-25 발행일 2014-11-30 제 2921호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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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겸손하던 박완서 작가에 감동”
「그 많던 싱아는…」 불어 번역
원작 문체 구현한 공로 인정

 프랑스에 한국 문화 공감대 형성
“한국문학 장점 프랑스 알리고파”
“수상소식을 듣고 믿을 수가 없었어요. 제일 먼저 박완서 작가 생각이 났었죠. 생전에 만나 뵐 때마다 그분의 겸손함에 감동하곤 했거든요.”

서울 하비에르 국제학교 명예교장 엘렌 르브렝 수녀(79·성프란치스코하비에르사도회)가 고(故) 박완서(정혜 엘리사벳·1931~2011) 작가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불어로 번역해 제22회 대산문학상 번역부문 수상자로 선정됐다. 지난 34년 동안 한국에서 생활해온 불문학 전공교수인 르브렝 수녀는 심사위원들로부터 “유려한 한국어 이해력을 바탕으로 원작의 문체를 잘 구현하는 한편, 번역가가 창의성을 발휘하여 불어의 등가를 추구했다”는 찬사를 받았다.

르브렝 수녀는 박완서 작가에 대해 “현실을 바라보는 예리함과 혜안을 갖고 있었다”며 “유머를 통해 자신이 전달하려는 시대의 무거운 메시지를 쉬운 문체로 전했다”고 평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의 불어판 제목은 「Hor les murs」(성벽 밖)이다. 르브렝 수녀는 이 제목을 불어로 옮기는 데 많은 고민을 했다. 프랑스에는 ‘싱아’라는 식물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성벽 밖’이라는 표현은 프랑스의 전통적인 표현입니다. 성벽은 자기자신의 자아를 외부로부터 보호하는 상징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성 바깥으로 나가 시야를 틔움으로써 비로소 자기역할을 하게 되고, 참 인간으로 살 수 있게 됩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아이는 조그만 시골에서 태어나 일제시대와 6·25 전쟁을 거쳐 계속해서 삶의 의미를 재구성하게 됩니다. 우물 안 개구리가 넓은 세계로 나가 자기가 겪은 것을 내놓으며 희망을 주는 셈이죠.”

한국과 프랑스를 잇는 문화적 ‘교량’ 역할을 수행하는 르브렝 수녀는 “한국문학에서 제가 느끼고 발견한 것을 프랑스 사람들과 나누기 위해 노력했다”며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가 사라져가고 있음을 안타까워 했다.

프랑스에서도 르브렝 수녀의 번역서에 대한 호응은 높았다. 지난 2012년 번역서가 프랑스에 출간되자, “당시 한국을 재현하는 무겁고 끔찍한 내용을 독자로 하여금 거부감 없이 공감하게 하는 문체로 풀어냈다”며 프랑스 사람들로부터 한국사회와 문화를 공감하는 데 크게 기여한다는 평을 받았다.

하비에르 국제학교 이사장인 르브렝 수녀는 이사장이라는 직함이 한국에선 ‘자본’을 연상시킨다며 손사래를 쳤다. ‘명예교장’이란 직함을 더 선호하는 그는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에서 신학생들을 대상으로 불어를 가르치며 미래의 사제들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현대인이 고민하는 문제들에서 출발해 그 사람들의 영성적인 기대에 마음을 열고, 그들에게 신앙적인 길을 제시하는 사람들이 됐으면 좋겠어요.”

프랑스 소르본대학과 동대학원에서 고전문학을 전공한 르브렝 수녀는 1980년 9월 당시 대구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 총장이었던 전석재 신부의 요청으로 한국 땅을 처음 밟았고, 이후 고려대와 서강대에서 불어와 불문학 등을 가르쳤다.

서강대 정년퇴임 후 2002년 초 서울 종로구 구기동에 하비에르 국제학교를 설립, 한국과 프랑스 간 교육분야 교류 및 발전에 기여해 지난 2013년 프랑스 자국 정부가 주는 최고훈장 ‘레지옹 도뇌르’(Legion d‘Honneur)를 받은 바 있다.

김근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