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주의 창

[방주의 창] 시골 유감 /이홍재

이홍재(치릴로·가톨릭농민회 안동교구연합회 부회장)
입력일 2014-11-18 수정일 2014-11-18 발행일 2014-11-23 제 2920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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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농촌의 들녘도 추수가 끝나고 한적함이 찾아옵니다. 이 산 저 산 형형색색의 가을 단풍이 가져다주는 자연의 신비를 음미할 시간도 없이 들녘과 신작로는 휑하니 비어 가고 어제의 부산했음에 지금은 더욱 외로워지나 봅니다. 한·중 FTA 타결 소식과 함께 저마다 이해타산을 셈하기 바쁜 가운데 향후 나에게 미칠 파장이 무엇인지 미처 가늠조차 할 수 없으니 바람 앞의 등불이 된 것 같습니다. ‘과연 이 농사를 계속 할 수 있을 것인가’ 안개 속 암울한 시절을 살고 있는 것 같아 답답하기 그지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다수의 경제적 이익이 다수에게 행복하다는 그릇된 인식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거대자본의 강요 속에 마지못해 편입 당해야 하는 농민의 불편함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은퇴할 나이가 되니 방황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동안 연락이 없었던 전 직장 동료들이 농사짓는 것은 어떠냐고 물어 오는 것도 다반사입니다. 찾아오는 친구들도 대부분 백수가 되어 이제 시간이 거추장스러워 지는 것 같습니다. 은퇴 후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과 함께 갑자기 단절된 생활에 인생의 의문을 표시하기도 합니다.

차가운 겨울이 되면 존재 가치가 없어 꿀만 축내는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어 결국에는 등 떠밀려 벌통 밖으로 밀려나서 생을 마감하는 수벌을 연상하면서, 시중에 떠돌고 있는 여러 우스개 시리즈들을 듣고도 담담히 삭혀야 하는 것이 우리가 나이 듦을 더욱 초라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이웃 한 분은 그래도 속칭 출세했다는 ‘사’자 자녀가 기껏해야 일 년에 두어 번 명절에 얼굴 보는 것이 전부라며 회한을 토로하더니 이제, 막 사회 진출한 자식 하나를 당신과 함께 살기위해 가까운 지역으로 데려오기 위한 공작을 펴고 있다는 말씀을 하더군요.

내년에 고3이 되는 늦둥이 아들이 있습니다. 그 분의 말씀에 적극 공감이 되어 농촌도시 학교의 기숙사에 있으면서 격주에 한 번 집에 다녀가는 아들에게 공부하는 것이 힘들면 졸업 후 아빠하고 농사짓는 것이 어떠냐고 넌지시 권유 해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시큰둥한 반응에 힘내어 “너는 대학교 졸업하고 취직 걱정은 하지 마라 아빠가 커다란 농장을 준비해 놓을 테니”라고 큰소리도 쳐 봅니다. 그래서 집에 오면 책 한 장 보지 않고 1박2일 동안 모니터만 들여다보다가 학교로 돌아가는 아들을 봐도 대범해질 수 있나 봅니다.

시골의 도로에는 유난히도 현수막이 많이 내걸립니다. 농촌의 길거리에서 겨울에는 더욱 을씨년스럽게 펄럭이는 그 현수막은 일 년 내내 누구 어느 집 자식이 박사가 되었다고, 공무원 시험에 합격 되었다고, 임용시험에 붙었다고 아니면 어느 대기업에 취직했다는 등 집안 사정까지 알려줍니다. 그것이 자식을 자랑하고픈 부모의 마음인가 봅니다. 현수막에 내걸린 그 자식들이 명절 때 반짝, 골목에 꼬리를 물고 주차된 고급 차량을 보는 것보다는 누구의 아들이 귀농·귀촌해서 부모님과 함께 산다고, 아니면 지역에서 문화카페를 개설 했으니 많이 애용 바란다는 그런 현수막을 이제는 보고 싶습니다.

오늘은 어느 동네 누군가가 노인요양시설에 들어갔다는 말보다는 누구 집 몇 번째가 부모의 가업을 물려받아 어머님을 모시러 농촌으로 내려왔다는 그런 현수막을 기대합니다.

농촌에 살아도 단풍의 아름다움을 보기는 힘듭니다. 농번기의 바쁜 일상으로 머리를 들고 먼 산 한번 쳐다볼 여유가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 세대는 그렇게 너무 쫓기면서 바쁘게 살아왔나 봅니다. 다음 세대도 그럴까 걱정이 됩니다. 경제적 소득과 행복은 상관이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위정자들은 경제가 만사형통인양 경제만 강조합니다. 우리는 아무 댓가 없이도 찾아오는 소소한 행복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옆에 늘 있는 가을 하늘의 맑음과 단풍의 찬란함이 고개를 들어야 보이듯이, 우리 인생도 옆에 언제나 함께하고 있는 행복을 즐길 줄 아는 인생이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홍재(치릴로·가톨릭농민회 안동교구연합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