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천주가사 하느님을 노래하다] (3)

강영애 교수(데레사·한양대),
입력일 2014-10-21 수정일 2014-10-21 발행일 2014-10-26 제 2916호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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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진 고문에도 “하느님만이 희망” 노래한 선조들

‘언문뒤풀이’ 쓴 남종삼 성인 등 주요 작자
현실을 우리 정서로 표현, 귀한 자료 남겨
보급 발전 위한 다양한 연구 지속돼야
전공자 육성 및 우리성가 미사 상설화를
서소문성지는 한국의 103위성인 중 44명이 처형된 국내 최대의 천주교 성지이다. 천주교가 한국에 정착되는 과정에서, 가장 많은 교우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장소인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올해(2014) 8월 한국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광화문광장으로 가시는 길에 이곳을 먼저 들르셨다.

순교자들은 모진 고문 속에서 남을 배려하는 가사를 지었으며, 서소문 밖 처형장으로 향하면서도 하느님을 찬양하는 천주가사를 불렀다. 천주가사는 작품의 특성상 작자나 연대가 불분명하지만, 저작자로 밝혀진 세 분의 성인이 있어 소개하려 한다. 기해박해 때 순교하신 민극가(Stephanus,1787~1840) 성인과 이문우(Joannes, 1809~1840) 성인, 그리고 병인박해 때 순교하신 남종삼(Joannes, 1817~1866) 성인이 오늘 소개의 주인공이다. 민극가 성인은 <삼세대의>, <천당강론>, <십계강론>, <지옥강론>을, 이문우 성인은 <옥중제성>을, 남종삼 성인은 <언문뒤풀이>를 쓰셨다.

<천당강론>은 민극가 성인이 천당에 관한 교리를 풀어 쓴 천주가사이다.

“가사이다 가사이다 천당으로 가사이다 / 천당은 어디런고 만복지소 여기로다

구중천 높은위에 천주영복 나타나니 / 삼위일체 영광이요 성령은총 바다로다

복해연류 흘러가니 성령지체 젖어있네 / 성모의 높은위는 십이수은 벌여있고

친애지신 사랑하며 치명지성 찬송하고 / 동정지녀 혼배지정 함께이어 송양하니…”

(천당강론, 민극가 성인)

이외에 1830년대 창작된 <삼세대의>는 영세를 받은 신자들이 묵상할 수 있게 엮은 노래인데, 많은 이본이 전하고 있어 신자들에게 애창된 곡임을 알 수 있다.

민극가 성인은 인천의 양반가문에서 태어나 어른이 된 후에 입교하였지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여 전교회장으로 임명되었으며, 깊은 교리지식으로 교우들을 가르쳤다. 인천, 수원, 서울 등을 순회하며 자선사업과 외교인들을 위한 전교활동으로 많은 냉담자들을 다시 교회로 이끌었다.

1839년 무렵 어느 배교자의 밀고에 따라 체포되었으며, 옥중에서도 배교자를 꾸짖거나 신심이 약해지는 신자들을 격려하는 등 많은 교우들에게 신앙인의 모범을 보였다. 1840년 1월 30일에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옥중제성>은 체포된 이문우 성인이 옥중에서 지은 천주가사이다.

“…세속괴롬 어떠하냐 지옥고통 그림자라 / 예수수난 생각하면 만의하나 다못되네

애주애인 열심하나 모든중에 먼저선택 / 불쌍하다 낙방거자 저영혼을 어찌하나

금년명년 우리생전 무심중에 찾으시리 / 열심사주 예비하여 엄형고초 달게받소

예수고상 성교도리 많이많이 생각하소 / 죽기까지 매맞아도 오천사백 다못맞네…”

(옥중제성, 이문우 성인)

자신의 지난날에 대한 반성과 주님께 대한 사랑은 물론,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을 생각하며 형벌을 참아내라는 권고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문우 성인은 경기도 이천의 양반 교우 집에서 태어났으나 5살 때에 고아가 되어 서울에 사는 오 바르바라의 양자로 갔다. 그는 모방(Manbant, 나베드로) 신부를 따라 지방으로 다니며 복사를 했고, 감옥에 갇힌 교우들을 돕기 위하여 모금활동을 하였다. 또한 주교와 신부들이 숨어 있는 곳으로 찾아가 정보를 알려주었고, 선교사들이 순교한 후에는 다른 교우들과 함께 시신을 거두어 장사를 지냈다. 1840년 2월 1일 서울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천주가사 <언문뒤풀이>를 쓴 남종삼 성인은 충주 지방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남상교는 높은 관직에 있었지만, 신앙생활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관직을 떠났으며, 천주가사 <경세가>를 지었다.

남종삼 성인은 문과에 합격한 후 홍문관 교리, 영월 현감, 영해 부사 등을 거쳐 승정원의 승지를 지냈다. 그는 높은 관직에 있으면서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였고, 신앙생활에 지장을 초래할 경우에는 부친처럼 물러나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흥선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인해 1866년 3월 1일 체포되었고, 1866년 3월 7일 서울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서소문성지 순교자 현양탑.(가톨릭신문 자료사진)

■ 천주가사를 보급하기 위한 작업들

위에서 살펴본 민극가 스테파노, 이문우 요한, 남종삼 요한은 목숨 바쳐 믿음을 증거 하다 돌아가신 한국의 성인들이다. 그분들은 하느님만이 희망과 용기를 주는 유일한 분이심을 강조하였으며, 박해와 현실적 어려움을 우리의 정서와 민속에 얹어 노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귀중한 자료를 우리는 외면하는 경향이 있다.

천주가사는 한국의 전통과 서양의 종교가 융합되는 과정에서 생산된 귀중한 유산이다. 일본에서는 우리가 하찮다고 여기는 민요나 전래동요조차도 귀하게 여기는데, 우리는 귀중한 유산조차도 하찮게 여기는 오류를 종종 범한다.

일본은 1941년부터 1980년까지 오랜 세월에 걸쳐, NHK의 네트워크를 동원해서 일본 전 지역의 민요를 녹음 채보한 바 있다. 전래동요(와라베우타) 역시 1961년부터 8년간에 걸쳐 전문가들이 채집 정리하였다. 이렇게 채집된 자료들은 체계적이고 방대한 자료집과 CD로 만들어 전승·보급하고 있는 실정이다.

정리하자면, 우리의 유산인 천주가사와 연도를 보급 발전시키기 위한 방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일회성이 아닌 다방면의 연구와 관심이 지속되어야 한다. 둘째, 미사전례에서 다른 성가와 함께 불러야 한다. 셋째, 교구 및 가톨릭대학교에 우리성가연구소를 신설하여 전공자들을 육성해야 한다. 넷째, 성지나 주요성당에서는 상시적으로 우리성가 미사를 드리거나 음반을 틀어놓아 신앙인의 정체성을 회복해야 한다.

강영애 교수는 음악인류학 박사로, 한양대와 교회음악대학원 강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서울대교구, 대전교구, 마산교구 가톨릭상장례봉사자교육 전문강사로도 활동중이다.

강영애 교수(데레사·한양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