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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전교의 달' 상념 / 박영호 편집국장

박영호 편집국장
입력일 2014-09-30 수정일 2014-09-30 발행일 2014-10-05 제 2913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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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은 묵주기도 성월이자 전교의 달이다. 말씀의 선포이든, 혹은 삶의 모범을 통한 것이든, 전교는 신앙인의 본질이다. 제국주의와 동반하는 폭력적 선교에 대한 반성이 신앙인의 소명을 가릴 수는 없다. 글로벌화한 세상 안에서, 고도의 다원주의 사회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기쁜 소식을 선언하고 선포하는 일의 중요성을 감소시키지도 않는다.

그리스도교에 대해서 노골적인 반감을 표시하는 이슬람 지역으로 무분별한 선교를 감행하는 이들이 있다. 가끔 이들이 인질로 잡혀가거나 목숨이 위험에 처하는 일이 생긴다. 그럴 때 사람들은 종종 그들을 향해 아직도 야만적이라고 비난을 하기도 한다.

그러면 전교, 혹은 선교는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할까? 한 마디로 말할 수 없는, 사실 이는 오래 된 물음이다. 고대교회에서 전교는 순교를 각오해야 하는 위험천만한 반사회적 활동이었다. 혹은 정반대로, 그리스도교가 사회와 국가가 인정하는 국교의 위치를 점한 뒤에는 오히려 이교도들과 다른 민족들을 억압하고 핍박하는 도구로 악용되기도 했다. 그런 사회에서 모든 이들은 강제로 신앙을 고백해야 했고, 정치적 팽창과 경제적 수탈을 목적으로 한 제국주의 세력은 거의 대부분 그리스도교를 이데올로기적 도구로 활용했다.

오늘날 전교활동의 장은 한 마디로 다원주의 환경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적으로는 수다한 종교들, 특히 그리스도교 이상의 막대한 교세와 그리스도교와의 지속적인 긴장과 갈등을 양산하는 이슬람교는 물론, 지역과 사회마다 각자 지배적인 전통 사상과 종교들을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만날 수 있다. 지역교회와 사회에 국한해서 보더라도, 즉 한국 사회만 해도, 종교 박람회라고 할 만큼 수많은 종교와 종교인들이 각축을 벌인다.

주요한 물음 중의 하나는 이것이다. 우리는 ‘전교의 달’로 상징되는, 선교, 복음선포, 복음화 등 여러 가지 단어와 개념들로 요청되는 ‘전교’에 대해서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 것인가?

사실 가톨릭교회가 세상과 다른 종교에 대해 마음의 문을 연 것은 불과 반 세기 전이다. 가톨릭교회가 공식적으로 세상과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너그럽게 열린 자세를 갖기 시작한 것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오히려 세상을 향해 문을 연 공의회가 오히려 가톨릭교회의 정체성을 훼손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전교와 관련해 초점은 대략 세 가지에 집중된다. 자기 신앙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 것, 다른 이들의 종교적 확신을 존중하는 것, 그러면서도 자신의 신앙을 설득력 있게 제시, 즉 전교하는 것이다. 말은 쉽다. 말로야 뭘 못할까. 끊임없는 긴장을 야기할 자기 신앙의 정체성 유지와 다른 종교에 대한 깊고 진심어린 존중 사이의 관계는 실로 어려운 일이다.

성찰컨대, 개종 시키려는 속내와 상대에 대한 가장된 존중 사이의 위험한 줄타기는 전교의 본질이 절대로 아니다. 복음의 선포는 진심어린 것이어야 하고, 자연스럽게 터져나오는 예수와의 만남이 주는 기쁨이어야 한다. 그래서 복음 선포는, 전교는 삶의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 모범을 우리는 초대교회 공동체에서 본다. 이른바 ‘대조사회’, 주위의 세속 사회와 구별되는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삶은 세상 속에 이미 존재하는 하느님 나라였다.

제자들, 초대교회 신자들의 복음선포가 힘이 있었던 이유는 하느님 말씀 자체의 신적 능력이기도 했지만, 세상과 다른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표본이기도 했다.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 말했다. 그리스도인들의 선포는 자기 삶에 그 힘의 바탕을 둔다. 그래서 바르게 살면, 그저 사는 게 선교다.

박영호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