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최양업 신부 시복 추진 사제단, 배티·배론성지 현장 실사

박지순 기자
입력일 2014-09-02 수정일 2014-09-02 발행일 2014-09-07 제 2910호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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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티성지 순례객 매해 10만 명… 시복 보고관 “놀랍다” 
시복 자료 압축한 문서 포지시오 
9월 초 제출 앞두고 현장 찾아
시복 결정까지 7년 여 소요 예상
사목 열정·영성 되새기는 계기 돼야 

124위와 함께 시복 추진했으나
순교자 아닌 ‘증거자’… 기적심사 필요
“한국 최초 증거자 시복에 관심을”
장봉훈 주교(뒷줄 오른쪽), 교황청 시성성 시복 안건 보고관 키야스 신부(오른쪽 제일 앞) 등이 배티성지 내 조선교구신학교 건물에서 최양업 신부 시복을 기원하며 기도하고 있다.
증거자 최양업 신부(1821~1861) 시복을 위한 가장 핵심적 절차 중 하나인 ‘포지시오’(Positio) 작성이 완료돼 이달 초 교황청 시성성에 제출된다. 포지시오는 시성성 역사위원회와 신학위원회 등의 심의를 위해 방대한 분량의 시복 관련 자료를 압축한 문서다.

포지시오 제출을 앞두고 최양업 신부 시복 업무를 책임지고 있는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총무 류한영 신부와 교황청 시성성 시복 안건 보고관 폴란드 출신 즈지스와프 키야스 신부, 포지시오 로마 공동 연구가로 활동했던 정시몬 신부(그리스도의 레지오수도회)가 8월 19일 최양업 신부의 사목 중심지였던 청주교구 진천 배티성지와 원주교구 제천 배론성지를 찾았다.

청주교구장 장봉훈 주교와 배티성지 담임 김웅렬 신부, 양업교회사연구소 소장 차기진(루카) 박사(최양업 신부 시복 역사전문위원)가 배티성지에서 류 신부 일행을 반갑게 맞았다.

최양업 신부 시복에 관심 환기할 때

키야스 신부는 최양업 신부의 완성된 포지시오를 시성성에 제출하기 전 서문을 작성해 첨부할 중책을 맡고 있다. 이번 배티성지와 배론성지 순례가 키야스 신부에게는 최양업 신부 시복 추진을 위한 ‘현장 실사’라는 특별한 의미도 지니는 이유다.

불과 3일 전에는 한국교회가 1997년부터 17년간 한마음 한뜻으로 통합추진했던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의 시복식이 광화문 광장에서 100만 인파가 운집한 가운데 프란치스코 교황 주례로 성대히 거행됐다. 최양업 신부의 시복도 1997년 주교회의 추계 정기총회에서 124위 복자와 통합추진이 결정됐지만 124위 시복이 가까워지면서 조금씩 신자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것이 사실이다. 이번 배티성지와 배론성지 순례에는 최양업 신부의 시복에 대한 관심을 다시 한 번 한국교회에 환기시킨다는 취지도 배경에 깔려 있다.

류 신부 일행은 오전 9시 배티성지 내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학교인 ‘조선교구신학교’(충청북도 기념물 제150호)를 찾아 최양업 신부의 시복을 기원하며 기도를 봉헌했다. 조선교구신학교는 1850년 성 다블뤼 주교(당시 신부)가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의 승인을 얻어 설립해 최양업 신부가 신학생들을 가르쳤던 곳이다. 1854년 폐쇄된 후에도 1856년까지 최양업 신부의 사제관과 성당으로 사용된 역사적 현장이다.

키야스 신부는 배티성지의 조성 경위에 관심을 드러냈다. 1993~1999년 배티성지 초대 담임을 지낸 장봉훈 주교는 자신이 진천본당 주임으로 있던 1976년, 판공성사 집전을 위해 배티공소를 방문시 4대째 배티에서 살아온 공소 회장으로부터 최양업 신부에 대한 증언을 듣고 배티가 최양업 신부의 중요 사목지였음을 처음 알게 됐다고 소개했다.

장 주교는 “1977년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최석우 몬시뇰에게 최양업 신부에 대한 사료 발굴과 연구를 요청했고 청주교구장이었던 정진석 추기경(당시 주교)이 주교회의에 배티성지의 존재를 보고하면서 배티성지가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돼 순례객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고 회고했다.

장 주교와 류 신부 일행은 조선교구신학교에 이어 배티성지 첫 성당 역할을 한 산상제대(야외 성당)와 최양업 신부가 최방제·김대건 신부와 유학을 가 신학공부를 했던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 건물을 모델로 건축된 ‘최양업 신부 박물관’, ‘최양업 신부 선종 150주년 기념대성당’ 등을 차례로 둘러봤다.

김웅렬 신부가 “최양업 신부의 9만 리 사목여정이 응축돼 있는 배티성지에 매해 10만 명의 순례객들이 찾아 온다”고 설명하자 키야스 신부는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시복을 결정하는 중요 요소 중의 하나가 시복 대상자에 대한 ‘평판’이라는 사실에서 최양업 신부를 기리는 성지가 교회의 각별한 노력으로 조성, 개발되고 다수의 신자들이 꾸준히 그 성지를 찾는다는 것은 최양업 신부의 시복 추진이 든든한 지원군을 확보하고 있다는 의미다.

장봉훈 주교 “아시아 선교 담당할 한국교회, 최양업 신부 시복에 힘써야”

장 주교는 “최양업 신부님이 한국인 사제로는 최초로 중국 선교를 담당했다는 사실은 3천년기 아시아 선교의 임무를 맡고 있는 한국교회가 최양업 신부님의 시복에 더욱 힘써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며 “최양업 신부님 탄생 200주년이 되는 2021년까지는 꼭 시복이 이뤄지길 기원한다”고 밝혔다. 최양업 신부는 1844년 부제품을 받은 후 1849년 사제가 되기 전까지 여러 차례 입국을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에 입국하지 못하고 주로 중국에서 선교했다.

장 주교는 이어 “최양업 신부님의 귀감이 되는 사목 열정과 고결한 영성이 첫 번째 사제가 아니라는 이유로 다소 묻힌 감이 있는데 이 부분도 시복을 통해 해소될 수 있을 것”이라고 부연했다.

류 신부 일행은 배티성지 순례를 마치고 오후 2시30분 경 최양업 신부의 묘가 있는 배론성지에 도착했다. 1999년 건립된 ‘최양업 신부 기념성당’에서 기도를 봉헌하고 한국교회 최초의 대신학교로 평가되는 ‘성요셉신학교’, 황사영이 ‘백서’를 작성한 토굴 등을 거쳐 류 신부 일행은 최양업 신부 묘를 찾아 참배했다.

최양업 신부 묘에서 키야스 신부는 류한영 신부로부터 최양업 신부의 선종 장소와 원인, 유해 이동 경로, 배론성지에 안장되게 된 내력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최양업 신부는 1861년 6월 12년 9만 리 사목 여정을 마치고 과로와 장티푸스로 선종했다. 나이는 40세였다. 시신은 현재의 배티성지 인근인 진천공소(경상도 문경이라는 견해도 있음)에 가매장됐다가 그해 11월 초 배론성지에 안장돼 현재에 이른다.

최양업 신부 탄생 200주년 되는 해 시복 기원

이번달 초 최양업 신부의 포지시오가 제출되면 올해 말 또는 내년 초에 시성성 역사위원회가 열려 최양업 신부의 성덕에 대한 심사를 하게 된다. 최양업 신부는 역사위원회와 신학위원회 심사 통과 후 시성성 추기경과 주교단 회의를 거쳐 ‘가경자’(可敬者, venerabilis, 시복 대상자에게 잠정적으로 주어지는 경칭)에 오른다. 이후 증거자의 시복에 요구되는 기적심사를 통과해야 복자가 된다.

순교자는 순교 사실이 기적으로 간주돼 기적 심사가 면제되지만 증거자는 증거자의 전구를 통한 기적 사실이 교황청 시성성에서 인정돼야만 시복이 이뤄진다. 그만큼 증거자 최양업 신부의 시복에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함을 알 수 있다. 기적심사는 현재 절차에 따라 사전 준비가 진행되고 있으며 시복이 결정되기까지는 향후 7년 내외가 소요될 전망이다. 시복이 가시화 되면 최양업 신부 묘를 개봉(開封)하고 신자들의 접근성을 높일 수 있는 장소로 이장하는 논의도 진행될 예정이다.

7년 뒤 최양업 신부의 시복이 결정된다면 최양업 신부 탄생 200주년과 더불어 한국교회는 최초의 증거자 시복이라는 겹경사를 맞이한다.

장봉훈 주교(왼쪽 세 번째)와 류한영 신부(장 주교 왼쪽), 키야스 신부(장 주교 오른쪽) 등이 최양업 신부 박물관을 관람한 후 기념촬영하고 있다.
류한영 신부(제일 왼쪽)가 최양업 신부 선종 후 배론성지에 안장되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는 모습.

박지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