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기고] 시복식, 한국사의 상념들 / 주원준 연구원

주원준(토마스 아퀴나스·한님성서연구소)
입력일 2014-09-02 수정일 2014-09-02 발행일 2014-09-07 제 2910호 23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광화문에서 열린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 미사’는 감동적이었다. 교회적 의미와 한국사적 의미가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시복식의 감동이 채 가라앉기 전에, 우선 세 가지 의미를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복자 윤지충의 의미다. 124위의 대표 윤지충은 신주를 불태운 분이다. 이땅은 지금도 유교적 가치가 엄연히 지배한다. 조상의 신주를 태운다면, 21세기에도 손가락질을 받을 나라다. 윤지충은 200여 년 전에 어머니의 신주를 태웠다. 그는 25세에 진사시에 합격한 양반가의 자제였다. ‘윤지충의 무리’는 조선사회의 스캔들이었다.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인간형이었다.

회유와 겁박은 통하지 않았다. 그는 일종의 강한 ‘확신범’이었고, 믿음과 소신을 굽히지 않은 죄로 1791년 순교했다.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천주학쟁이들은 ‘무부무군’(無父無君)의 무리들로 낙인 찍혔다. 충과 효를 신주처럼 모시던 조선조였다. 아비도 모르고 임금도 모르는 자들, 사회의 기본 가치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자들을 살려 두어서는 안된다는 여론은 들끓었다. 피바람이 불었고, 양반가에서는 서학에 물든 피붙이의 이름을 족보에서 지웠다.

둘째, 천주교의 위상이 급변했다. 패륜아의 무리는 한국사회의 당당한 구성원이 되었다. 정치적·종교적 가치가 다르기 때문에 억압받은 기억은 그전에도 그후에도 있었다. 조선은 불교를 억압했고, 어지러운 세상에서 이따금 종교적 민란이 일었다. 하지만 학살에 가까운 탄압을 100년이 넘게 꾸준히 받은 기억도, 그런 박해를 이기고 이렇게 화려하고 떳떳하게 부활한 집단도 일찍이 한국사에 없었다.

교종은 서소문을 거쳐 광화문으로 이동하셨다. 서소문은 처형이 시행된 곳이고 광화문은 처형이 결정된 곳이다. 조선 건국이래 이 나라의 대표와 정부는 광화문에 있어 왔다. 200여 년전 패륜아들의 후손들은 광화문 한복판에 십자가를 세우고 시복식을 시행했다. 서소문과 전국에서 처형된 천주학쟁이들은 그들의 후손들이 이 사회의 주요 구성원임을 이처럼 떳떳하고 대규모로 공표할 수 있으리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셋째는 시의적절한 교종의 가르침이다. 한국의 순교자들은 아름다운 평등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다. 기근과 가뭄이 끊이지 않고 탐관오리가 들끓던 시대, 교우촌에서는 굶어죽는 이가 없었다. 신분과 남녀의 차별이 당연하던 시대, 그들은 세상의 도전을 물리치고 복음의 가치로 평등하게 살았다.

교종은 새롭게 일깨워 주셨다. 지금껏 우리는 평신도가 자발적으로 세운 교회요, 지적·신앙적 호기심으로 시작한 교회임에 자부심을 느꼈다. 교종은 거기에 더하여, 사도행전의 초대 교회 공동체같은 아름다운 평등 공동체를 이루었음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그런 “비범한 전통”을 이어가야 한다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이중계명을 분리하지 말라고 가르치셨다. 우리 믿음은 본디부터 한국사와 결별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던 것이다.

끝으로, 박해시대에 ‘관변측 자료’를 정리한 「사학징의」(邪學懲義)의 한 대목을 상기하고 싶다. 윤지충이 죽고 2년 후에(1801년) 이루어진 신문에서 동료 순교자들이 똑같은 말을 세 번이나 하셨다. 예언처럼 맞아 떨어진 죽음 직전의 이 말씀은, 아직도 우리 후손들의 적극적인 성찰을 기다리고 있다.

“천주당은 윤지충의 무덤 위에 세워질 것이다”(이우집 1번, 유관검 2번)

주원준(토마스 아퀴나스·한님성서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