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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2014년, 124위 시복되기까지 노력들

박지순 기자
입력일 2014-08-19 수정일 2014-08-19 발행일 2014-08-24 제 2909호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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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가까운 시복 여정, 한국교회 한마음 한뜻으로 마쳐
124위 한국 초기 순교자 시복까지는 20년에 가까운 각고의 노력이 있었다. 103위 성인의 탄생 이후 한국 교회는 성인들에 앞서 한국교회의 초석을 놓은 순교자들에 송구한 마음으로 제2의 시복 절차를 시작했고, 많은 이들의 노력을 통해 교황이 직접 주례하는 시복식을 박해의 현장에서 거행하게 된 것이다. 그간의 여정에 함께했던 이들의 노력과 보람을 들어본다.

16일 124위 시복은 한국교회 전체가 협심, 하느님의 은총으로 거둔 결과이다. 한국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교황청에 주재하는 한국인 사제들은 물론 평신도들까지 한국 초기교회 순교자들의 신앙을 기리고 본받기 위해서 제2의 시복시성에 헌신했다. 본격적으로 전국 모든 교구가 합심해서 시복을 추진한 것이 1997년. 주교회의 추계 정기총회에서 124위 복자의 시복을 통합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설치된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총무이자 124위 시복 청원인인 류한영 신부는 “124위 시복을 위해 헌신한 분들이 많지만 박정일 주교(전 마산교구장)님이 시복의 기틀 마련과 모든 중요 과정을 총괄하셨다”고 말했다. 박정일 주교는 2001년 10월 시복시성특위가 구성되면서 초대 위원장을 맡아 2012년 3월까지 역임한 124위 시복의 주역 중 주역이다.

박정일 주교의 뒤를 이어 시복시성특위 제2대 위원장을 맡은 안명옥 주교(마산교구장)는 124위 복자의 포지시오 작성과 제출, 교황청 시성성 심사를 마무리했다. 포지시오는 교황청 시성성 통상 회의에서 시복 안건의 최종 결정을 위해 보고관이 작성하는 심사자료를 뜻하며 시복절차 중 핵심을 이룬다.

16일 시복식 당일 124위 약전을 낭독한 김종수 신부(로마 한인신학원장)는 시복 추진이 성공적으로 이뤄진데 대해서, 이는 어느 누구 몇몇의 공적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김 신부는 “한국교회의 역량이 커셔서 신학자, 역사학자, 교회법학자 등의 연구와 서로간의 협조가 잘 이뤄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 신부는 나아가 시복 추진 과정 전체 안에서 “한국교회 신자들의 적극적인 순교자 현양과 기도에 힘입은 바 크다”고 강조했다.

교황 방한을 앞두고 마무리 준비가 한창이던 8월 11일 오전 7일 개막된 ‘서소문, 동소문 별곡’ 전시회를 찾은 4명의 신부들은 모두 시복 과정을 선두에서 이끌어온 시복 추진의 주역들이다. 류한영 신부는 복자 124위 시복 청원인, 이찬우 신부는 시복 재판관 대리, 폴란드 출신 키야스 신부는 시복 안건 보고관, 정시몬 신부(그리스도의 레지오수도회)는 포지시오 로마 공동연구가로 상호 긴밀한 협력 속에서 헌신적으로 시복 과정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이날 류한영·이찬우·키야스·정시몬 신부는 ‘서소문, 동소문 별곡’ 관람에 이어 서소문 순교성지와 당고개 순교성지를 거쳐 새남터와 절두산 순교성지를 순례했다. 이들 시복 추진 사제단은 12일 서울시내 성지순례에 이어 13일에는 124위 복자 중 대표순교자인 윤지충이 순교한 전동성당을 찾아 미사를 봉헌했다. 이들 시복 추진의 주역들은 한결같이 입을 모아 말한다. 복자 탄생은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한 마음으로 뜻을 모아 노력한 결과라는 점이다. 한국 천주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이 시복의 여정에 함께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각 교구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 및 순교자현양회, 본당을 중심으로 한 기도와 성지순례 운동, 한국교회사연구소와 각 교구 교회사연구 기관의 순교자들에 대한 사료 발굴과 연구들도 그 한 몫이다.

2004년 7월 5일 하느님의 종 124위 시복 법정 개최.
2006년 2월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조사단 124위 현장조사.
2009년 6월 3일 교황청 시성성에 124위 시복 청원서 공식 접수.
2011년 11월 한국평협 ‘시복시성을 위한 전국 성지순례’.

박지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