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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특집-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살리라] 현대적 의미의 박해·순교

서상덕 기자
입력일 2014-04-15 수정일 2014-04-15 발행일 2014-04-20 제 2891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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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박해 맞서 신앙 증거할 때 ‘부활’ 체험
현대에서는 인종·정치·문화적으로 가하는 박해 빈발
개인·물질주의 여파로 없는 이 돌보는 ‘신앙’도 위축
가난·소외된 이웃 아픔 함께하는 것이 오늘날 순교
박해는 곧 죽음이나 다름없었다. 그것도 홀로 소멸해가는 것이 아니라 떼죽음이었다. 인류 역사 안에서 박해는 주로 종교적 신념과 그 신앙에 따른 행위들을 금하고 탄압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현대사회에 들어서 박해는 다양한 이유로 개인이나 집단이 다른 집단에 조직적으로 가하는 차별과 소외로 의미가 확장된다. 따라서 전통적 의미의 종교적 박해 외에도 인종이나 지역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인종적 박해, 사상·이념의 차이에 따른 정치적 박해, 선호하는 문화의 차이에서 드러나는 문화적 박해 등 과거와는 다른 다양한 모습을 띠게 된다. 이러한 박해는 서로 겹쳐 나타나기도 한다.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박해는 신앙의 위기를 초래하는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시(時)와 공(空)에 따라 여러 가지 모습으로 드러나는 박해와 이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응전이라고 할 수 있는 순교는 그대로 2000년 전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현재에 살려내는 것이다. 우리가 상상치 못하는 모습으로 현재화하는 순교와 부활의 삶을 돌아본다.

신앙 위기를 낳는 현실

2000년 교회 역사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개막 50주년을 맞아 공의회 정신을 돌아보고 새롭게 계승해나가기 위해 선포된 ‘신앙의 해’는 현대교회가 맞닥뜨린 ‘신앙의 위기’ 상황을 새삼 확인시켜주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회칙 ‘교회의 선교 사명’(1990년)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신앙의 활력을 잃게 만드는 요인으로 꼽은 개인주의, 세속주의, 상대주의, 물질만능주의 등은 2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신앙 위기의 핵심이다. 이는 달리 말해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박해적 상황이 구조적일 뿐 아니라 그 뿌리가 깊다는 것을 보여준다. 신앙의 위기를 낳는 현실들을 단편적으로만 바라봐서는 갈수록 신앙의 가치를 재발견하기 힘든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이러한 우려는 곳곳에서 가시화되고 있다. 교회 안에서조차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는 개인주의와 물질만능주의 등이 그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오늘을 살아가는 가난한 이들의 바람과 기도, 나아가 울부짖음을 귀 기울여 들을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교회 안에서 가난한 이들을 찾아보기 힘들게 된지 오래다. 목소리는 거의 들을 수조차 없다. 당연한 수순으로 모든 이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참다운 구원으로 인도해야 할 예언자적 사명은 한낱 구호에 지나지 않게 됐다. 같은 하느님을 고백하는 이가 한 형제를 박해하는 상황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발을 디딘 채 박해자로 살아가는 현실이 확산되고 있다.

돈이라는 물신

뚫어져라 쳐다보는 통장, 잉크로 또박또박 찍혀 있는 잔고가 바뀔 리 없다.

‘하아~~’ 한숨이 절로 나온다. 유형선(가명·미카엘·42)씨에게 삶은 그 자체로 질곡이자 고통이다.

유씨는 이른바 비정규직이다. 대기업 생산 라인에서 정규직과 똑같이 일한지 몇 년째지만 갈수록 자신의 처지가 비참하다는 생각만 커지고 있다. 같은 일을 하는 노동자지만 정규직인 동료와 임금 차이는 적지 않다. 하지만 정작 유씨를 더 힘들게 하는 건 따로 있다. 같은 직장에서 같은 일을 하는 동료라고 생각한 정규직이 자신과 같은 비정규직을 따돌리는 건 물론이고 노골적으로 무시할 때는 참기 힘든 모멸감이 밀려왔다. 정규직보다 돈은 조금 덜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개인이 지닌 돈이 그 사람의 인격마저 좌우하는 현실 앞에서 몇 번이나 무릎이 꺾이는 체험을 해야 했다.

“개인의 노력 여하보다는 돈 때문에 학력 차이도 생기고 결국 사회에 나와서도 출발선이 다른 삶을 살아야 하는 거잖아요.”

회사 내 신자모임에서조차도 낯을 붉히는 일이 생기면서 유씨와 비슷한 처지의 비정규직은 갈수록 설 자리가 줄어들고 있다. 사장을 비롯한 간부 가운데 상당수가 신자지만, 문제를 제기하면 따가운 훈계만 돌아올 뿐이다.

“이건 좀 아니다 싶었어요. 신앙을 나누며 기쁨을 얻을 수 있어야 하는데….”

결국 유씨가 선택한 것은 비정규직 노조를 만들어 왜곡된 방향으로 흘러가는 세태와 그러한 흐름에 휩쓸려가고 있는 동료들의 의식을 흔들어 깨우는 일이었다.

매서운 눈초리가 쏠리리라고 예상은 했지만 회사 측의 공세는 상상 이상이었다. 노조에 함께한 몇몇 동료는 전혀 경험이 없는 다른 부서로 자리가 바뀌는가 하면 특근에서 제외되는 일도 수시로 생겼다. 회사에서 몇 차례나 솔깃한 제안을 해오기도 했지만 유씨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울며 겨자 먹기식이지만 회사 측 책임자, 정규직 대표와 처음으로 협상테이블에 함께 앉았을 때의 감동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시던 예수님의 마음을 자주 묵상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정신을 삶 속에서 살려내고, 또 살아가는 것이 일상에서 체험하는 부활이 아닐까 합니다.”

수원교구 안양엠마우스에서 학생 봉사자가 다문화가정 아동에게 기타를 가르쳐주고 있는 모습. 인종·문화 등에 대한 차별·소외로 의미가 확장되는 현대사회 박해에 맞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며 신앙을 증거할 때 비로소 부활을 체험하게 된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문화의 차이

베트남에서 온 판 깍 뜨으(가명·Phan Khac Tu·29)씨는 지금도 그때 기억이 되살아나면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가 쳐진다. 경기도 남양주시 마석가구단지에서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겨울이었다. 불법체류 외국인노동자를 단속하는 출입국관리소 직원들과 경찰들로 구성된 200여 명의 합동단속반이 들이닥쳤다. 단속반원은 인간사냥을 하는 사냥꾼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눈빛부터 달랐다. 몸짓 하나하나에서 살벌함이 묻어났다. 방글라데시 출신 노동자 300여 명과 필리핀, 베트남 등지에서 온 이주노동자 800여 명이 일하고 있는 이 지역에서만 그날 100명이 넘게 잡혀갔다. 어쩔 줄 몰라 기숙사 방에 숨어있던 그도 끌려나왔다. 다행히 판씨는 잡혀가지 않았지만 같은 방을 쓰던 동료는 옥상 기숙사에서 뛰어내리다가 크게 다치고 말았다.

“우리도 분명 사람인데…, 우리는 같은 사람이 아니었어요.”

일감이 몰리는 철에는 하루 2시간만 자고 새벽까지도 일하는 게 보통인 판씨에게 유일한 위안은 짬이 나는 주일 서울 보문동 베트남공동체에서 미사 후 친구들을 만나 고향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전체 국민 대비 이주민 인구 비율이 2.5%가 넘으면 다문화 국가로 분류된다. 우리나라는 이미 지난 2012년 140만 명의 이주민이 들어와 다문화가 일상이 됐다. 하지만 이주민에 관한 우리 사회의 의식 수준은 매주 낮다. 이주민은 함께 살아가는 이웃이라기보다 여전히 경계와 배척의 대상으로 비춰지기 일쑤다.

한국인 여성과 교제하며 판씨의 고민은 깊어졌다. 비록 아픈 기억이 적지 않은 곳이긴 하지만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할 이유가 생긴 것이다.

“외모가 조금 다르다고 자세히 알지도 못하면서 자의적으로 판단하고, 함부로 대하는 모습을 바꿔나가는데 힘을 보태고 싶어요. 그래야 미래에는 희망이 더 자라날 테니까요.”

판씨는 자신의 일터와 가까운 이주노동자상담소에서 도움이 될 만한 일거리를 찾고 있다. 분명 피곤하고 힘든 일이다. 굳이 나서지 않아도 될 일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머릿속에 그런 생각을 불러일으킨 분이 주님이심을 믿기에 따라보기로 했다. 그는 그렇게 부활의 삶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오늘날에 있어 순교가 무엇일지 고민해본 적이 없다는 그는 “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 8,32)는 말씀을 늘 묵상하고 있는데, 제 마음에서 불편함을 느낀다면 한 번 되돌아보고 주님의 뜻을 되새기면서 살려고 노력하는 것에서 순교의 의미를 묵상하게 된다”고 말했다.

따져보면 그리스도인의 일상이 박해와 순교가 동시에 이뤄지고, 늘 부활이 일어나는 현장이다.

두물머리복음화연구소 황종렬(레오·대구가톨릭대학교 겸임교수) 소장은 “일상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위임받은 하느님 살림을 살아가는 것을 방해하고 가로막는 모든 것이 박해이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아픔을 기억하고 함께 연대하며 그들 가운데 함께하시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오늘날의 순교”라고 말한다.

그는 아울러 “박해와 순교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복잡다단한 현대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끊임없이 재확인하며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여정에서 순교신심을 가다듬어 나갈 때 부활을 체험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서상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