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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교회의 가르침] (13) ‘구원에 이르는 고통’ ②

박준양 신부
입력일 2014-04-15 수정일 2014-04-15 발행일 2014-04-20 제 2891호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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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함께 나누는 ‘공동체 영성’으로 구원 동참을
고통, 인간의 정신적 위대함·영적 성숙 드러내라는 ‘초대’
“그리스도 수난 동참은 곧 하느님 나라 실현 위한 투신”
타인 고통에 관심 갖도록 일깨워주는 것이 교회 역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재위 1978~2005년)는 1984년 교서 ‘구원에 이르는 고통’(Salvifici Doloris)을 통해 인간 고통의 의미에 대하여 말한다. 특히 현대의 보편적 고통에 관심을 기울인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시대는 “현대 문명의 과오와 범죄”로 말미암아 “인류의 자멸조차 초래할 수 있을 만큼 유례없는 고통의 축적”이 이루어졌음을 지적한다. 이는 “고통의 세계가 우리네 시대에 있어서는 아마도 다른 어느 때보다도 더욱 하나의 특별한 세계로 변형”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세계는 유례가 없이 인간의 노력을 통한 진보에 의해 변형되어 온 세계인 동시에, 역시 유례가 없이 인간의 과오와 범죄로 말미암아 위험에 처해 있는 세계”라는 진단을 내린다(8항 참조).

고통의 의미 문제에 대한 해답의 추구

오늘날 인간의 보편적 고통을 깊이 체험하고 있는 까닭에, 그러한 고통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해답의 추구 역시 매우 절실해진다. 그래서 먼저 성경을 통해 그 해답을 찾아보고자 한다. 먼저, 인간이 저지른 죄악의 결과로서, 죄에 대한 벌로서의 고통을 생각해볼 수 있겠다.

구약 성경에는 고통이 우리의 죄에 대한 벌로서 찾아오게 되었다는 해석이 나오지만, 동시에 벌로서의 고통이 지닌 교육적 가치를 또한 강조하기도 한다. 즉, 하느님께서 당신의 선택된 백성에게 내리시는 고통들 속에는 그들을 회개시켜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자 하시는 자애로운 섭리와 초대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벌은 범죄라는 객관적 악을 또 다른 악으로써 응징하는 역할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 받는 인간 주체 안에 선을 재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조성해주는 긍정적 역할을 하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잘못으로 인해 주어지는 벌을 통해 죄를 뉘우치는 회개에로의 부르심을 발견할 수 있고, 바로 여기에서 하느님의 정의와 자비를 동시에 인식할 수 있게 된다(12항 참조). 즉, 한편으로, 하느님께서는 당신 정의로 인간의 죄를 벌하시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잘못한 인간을 내치지 않고 회개에로 인도하는 자비를 드러내시는 것이다.

하지만 왜 고통이 존재하는가 하는 근원적 질문에 대한 진정한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의미가 흘러나오는 원천인 하느님 사랑에 주목해야만 한다. 사랑은 인간사에서 발견되는 모든 고통의 의미가 흘러나오는 근본적 원천이라고 요한 바오로 2세는 말한다. 즉, 사랑은 고통의 의미 문제에 대한 해답의 가장 충만한 원천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신비를 통해 그 직접적인 해답이 주어졌다고 설명한다(13항 참조). 하느님께서는 사랑 때문에 인간을 창조하시고 자유를 주셨으나, 인간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죄의 고통이 찾아오게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또한 사랑 때문에 당신 아드님의 고통을 허락하셨고, 이로써 인간을 파멸시키는 결정적 악에 대항하여 그 결정적 고통으로부터 인간을 구하고자 강생의 신비와 십자가의 신비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고통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 절정에 도달하였으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 고통을 정복하였기에, 이제 인간의 고통은 온전히 새로운 차원과 질서에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18항 참조).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는 사람들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을 대신하여, 그리고 인간을 위하여 고통의 심연을 겪으시며, 고통의 의미를 근원적으로 변화시키셨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과 신비를 통해, “인간 누구나가 구속 사업에 있어 자신의 몫을 가지고 있으며, 각자 모두가 구속 사업이 성취하게 한 그 고통에 참여하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다”고 요한 바오로 2세는 말한다. 즉, 모든 인간이 자신의 고유한 고통을 겪으면서 그리스도의 구속적 고통에 참여하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19항 참조).

바로 이러한 새로운 고통관, 역설적인 구원의 고통관을 사도 바오로가 힘차게 증언한다.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으면서도 늘 예수님 때문에 죽음에 넘겨집니다. 우리의 죽을 육신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을 일으키신 분께서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일으키시어 여러분과 더불어 당신 앞에 세워 주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2코린 4,8-11.14)

그런데 이러한 그리스도의 구속적 고통에 참여한다는 것은, 결국 하느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성장하여 굳세어진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 나라를 위해 받게 되는 고통과 연결된다. “여러분의 믿음이 크게 자라나고 저마다 서로에게 베푸는 여러분 모두의 사랑이 더욱더 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분이 그 모든 박해와 환난을 겪으면서도 보여 준 인내와 믿음 때문에, 하느님의 여러 교회에서 여러분을 자랑합니다. 이는 하느님의 의로운 심판의 징표로, 여러분이 하느님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실 여러분은 하느님의 나라를 위하여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2테살 1,3-5)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따라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한 고통에 동참한다는 것은 곧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의 성장과 실현을 위해 투신하다가 고통 받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는 것은 동시에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의로우신 하느님의 눈에는,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 나라를 차지할 자격을 얻게 됩니다. 고통을 통하여 그들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이 지닌 무한한 값을 어떤 의미에서 다시 치르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이 지닌 값은 우리를 구원하는 속전(贖錢)이 되었습니다. 즉, 이 값이 치러짐으로써 하느님의 나라가 인간의 역사 안에서 새로이 공고해지게 되었으며, 지상에서의 인간 실존에 결정적인 전망이 펼쳐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고통을 통하여 우리를 이 나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또한 고통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구원 신비에 감싸인 사람들도 이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성숙하게 됩니다.”(21항)

그러므로 고통은 인간의 정신적 위대함과 영적인 성숙을 드러내라는 하나의 초대일 수 있다. 이러한 영적 성장의 모범이 세세대대를 통해 순교자들과 증거자들에 의해 드러난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 나라를 위해 고통을 겪는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에게 베풀어진 하느님 구원능력의 역사하심에 특별히 ‘민감해진다’는 것, 특별히 거기에 ‘마음을 열어놓는다’는 것을 의미한다”(23항)고 요한 바오로 2세는 말한다. 시련과 고초 속에서 성령을 받아 인간이 영적으로 ‘길들여진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의 소명이자 특권인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이 특권적 소명이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 5,3-5)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교서 ‘구원에 이르는 고통’에서, 스스로의 고통 체험으로 길러진 영적 감수성을 통해 그리스도인은 고통 중에 있는 모든 이들과 특별히 결합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루카 복음서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10,29-37 참조)는 ‘고통의 복음’, 즉 고통 중에 있는 우리 이웃에 대한 우리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이다. 강도들을 만나 폭행을 당하고 길에 쓰러져 거의 죽게 된 사람을 보고서 사마리아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멈추어 선다. 여기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고서 마음이 움직이는 사마리아인의 ‘자비심’이다. 우리 모두 이 자비심, 즉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한 민감성을 길러야 한다고 요한 바오로 2세는 강조한다. 바로 이 자비심으로부터 자신의 시간과 재물, 즉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구체적 행동이 나오기 때문이다.

비참한 인간 고통의 세계는 역설적으로, 인간 본연의 사랑의 세계에로 우리를 인도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고통 덕분에 인간은 마음과 행동을 자극하는 몰아적인 사랑을 얻기”(29항) 때문이다. 고통을 직접 겪은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고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보고서 ‘멈추어 설’ 줄 알아야 하며, ‘가엾은 마음이 들어’ 자비를 베풀 수 있는 영적 민감성을 지녀야 한다. 이러한 영적 감수성은 자신 스스로의 고통 체험을 통해서 길러질 수 있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관심, 즉 영적 민감성을 사람들에게 일깨워주고 영적으로 성장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바로 교회의 역할인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고통 중에 있는 모든 이들과 특별히 결합하여 살아야 한다고 요한 바오로 2세는 강조한다. 현대 세계가 드러내고 있는 선과 악의 극심한 교차와 투쟁 속에서 우리의 고통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결합하여 마침내 승리하기를 바란다는 축원으로 ‘구원에 이르는 고통’(1984)은 끝을 맺는다. 이러한 요한 바오로 2세의 간절한 축원은 30년이 지난 지금 2014년에도 여전히 유효한, 어쩌면 더욱 빛을 발하는 축원인 듯하다.

박준양 신부는 1992년 사제로 서품, 로마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교의신학 전공으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의신학 교수로 봉직하고 있는 박준양 신부는 신학과사상학회 편집위원장 및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 총무, FABC 신학위원회 전문신학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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