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쇄신과 평화, 성인 교황들] - 요한 23세와 요한 바오로 2세 (중) 선한 벗이었던 목자

주정아 기자
입력일 2014-04-15 수정일 2014-04-15 발행일 2014-04-20 제 2891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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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전통’ 아닌 ‘대화·쇄신’으로 진정한 소통 추구
사제 시절부터 사람들 만나고 대화하는데 힘썼던 두 교황
교황 선출 직후에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가장 먼저 찾아
‘교황직’ 관습 등 격식 폐지하며 사람들에게 ‘벗’으로 다가서
요한 23세는 선출 직후 사람들이 교황 앞에서 무릎을 꿇는 관행부터 금지시켰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사람들이 막무가내로 말을 듣지 않고 무릎을 꿇자, 본인도 무릎을 꿇고 인사하는 해법을 냈다. 이후로 누구도 요한 바오로 2세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았다.

‘교황’직에는 그 호칭에서부터 뒤따라오는 수많은 예우들이 있다. 게다가 오랜 기간 교황들은 전통과 관습으로 고립돼 있었고, 사회적 관계나 접견도 매우 공식적으로 이뤄지곤 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두 교황의 행보는 교황청 내부 구성원들조차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파격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교황을 이른바 ‘황제’로 만드는 격식을 거침없이 폐지시켜 나갔다.

요한 23세와 요한 바오로 2세는 둘 다 교황이 되자마자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가장 먼저 찾았다. 굳어진 전통을 깨는 행보였다. 두 교황에게는 어떤 사회적 장벽도 사람들을 만나고 사랑하는 일에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그들은 권위와 순명 대신에 대화와 쇄신을 택했고, 세상 변화에 대응하고, 쇄신으로 나아가는 데에도 망설임이 없었다. 세상을 향해 교회의 문을 활짝 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역사도 이 두 교황을 만나지 않았으면 결실을 맺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새로운 도전은 하루아침에 시작된 것은 아니다. 특히 두 교황은 사제 시절부터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하는데 쉼 없이 힘써왔다. 권력이 아닌 진정한 소통을 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가 세상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늘 고민했다. 이러한 모습에 그 누구도 요한 23세와 요한 바오로 2세를 ‘아빠 papa’라고 부르길 망설이지 않았다.

■ 어진 목자 요한 23세

“나는 오직 가난한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기 위해 사제가 되었습니다.”

서품 후 첫미사를 봉헌하며 안젤로 론칼리 신부(요한 23세 교황)는 또 한 번 다짐했다.

그가 신학생 시절을 보내던 때, 세계 곳곳에서는 산업화로 인한 사회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됐다. 공장들이 대규모로 건설되면서 노동자층인 빈민들은 더욱 착취당했고, 어린아이들조차 중노동에 내몰렸다. 하지만 교회는 이들의 아픔을 외면하기 일쑤였다. 신자들은 교회에서 대거 일탈했을 뿐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와 무정부주의 등에 물들어갔다. 점차 교회 안에서도 ‘사회주의를 욕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먼저 사회정의 실현에 노력해야 한다’는 목소리들이 커져갔다.

론칼리 신부도 누구보다 용감하게 ‘거대 자본에 맞서 그리스도교 노동단체를 결성하는 자유의 기본 원칙’을 외쳤다. 교회법 박사학위를 받고 신학교 교수직을 수행하면서도 론칼리 신부는 노동자들,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편에 서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에 앞서 제1차 세계대전 중 군종신부로 파견되는 경험은 “지상의 평화, 이보다 아름답고 이보다 위대한 일이 또 있을까”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살게 했다.

사실 그는 평범한 시골본당 신부나 교회사 교수가 되고 싶어 했다. 그가 평생 관심을 갖고 공부한 분야도 역사의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몬시뇰이 된 후 로마 교황청립 라테라노대학 교수로 임용됐지만, 전통을 중시하는 라테라노대학에서 진보적 성향의 사제를 고분고분 둘리 없었다. 그는 진보주의 교회사가와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한 학기도 채우지 못한 채 교수직을 빼앗겼다.

이후 수십 년간 불가리아, 터키, 그리스 등지에서 교황대사를 역임했던 시기는 보수주의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한직을 떠도는 초라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많은 신학자들은 이 시기가 교황이 된 후 교회 쇄신을 이루는데 단단한 디딤돌이 됐다고 평가한다. 이 시기, 론칼리 주교는 다른 사람의 의견과 경험을 존중하는 자세, 지혜로운 외교 실력, 온화함으로 더욱 힘을 얻는 추진력 등을 더욱 다져갔다. 당시 그의 이름 앞에는 ‘서로 이해하도록 합시다’라는 그의 말이 함께 따라붙을 정도였다. 또한 갈라진 그리스도교의 현실 속에서 지낸 시간은 훗날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을 세우는데 중요한 밑거름이 됐다.

1921년 주교품을 받을 때 그는 문장에 ‘순명과 평화’(Oboedientia et pax)를 새겼다.

63세 고령의 나이에 프랑스 주재 교황대사로 임명된 것에는 스스로도 놀랐다. 그 시절에도 론칼리 주교는 늘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모습, 검소하고 친절한 모습으로 사람들과 격이 없이 지냈다. 심지어 사회주의자도 반성직주의자도 그와 친구가 되어 대화했다.

71세의 나이로 추기경이 되었을 때도 ‘나는 사목자일 뿐’이라며 교황청 행정직에 소환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저는 어린 시절 어렵지만 축복받은 가난 속에서 자랐습니다. 가난이 저를 성숙시키고 세상을 보는 눈을 열어주었습니다.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고 사회적 약자들과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가톨릭신앙을 굳게 지키면서도, 그들과 대립하기 보다는 일치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어진 목자’가 베네치아교구장으로 착좌하면서 밝힌 첫 인사말이었다. 이후로도 그의 삶은 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였다.

안젤로 론칼리(요한 23세, 앞줄 왼쪽에서 첫 번째)의 신학교 시절 모습.

■ 벗이 된 요한 바오로 2세

“이제 교황이 됐는데 어떻게 아저씨라고 부른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선출 소식이 전해지자 폴란드의 한 어린이가 내뱉은 말이다. 카롤 보이티와 신부(요한 바오로 2세)는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삼촌’ ‘아저씨’ 등으로 불렸다. 누구와도 친근하게 지내는 그의 면모를 잘 드러내는 별칭이다.

어린 시절 ‘롤렉’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카롤 보이티와는 자신이 사제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철학과 문학에 심취해 조국 폴란드가 공산 정권 아래 있던 암흑기에도 연극이나 문학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던 청년이었다. 공장에서 노동을 하면서도 밤에는 연극을 통한 저항운동을 하며 노동자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심어주기도 했다. 하지만 훗날 그는 채석장에서 돌을 캐고, 정수시설에서 힘겹게 노동했던 경험이 교회와 사제직에 얼마나 중요한 주제인지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특히 보이티와 신부는 제2차 세계대전, 나치의 점령기간 동안 그의 사제성소는 구체적으로 형성됐다고 밝혔다. 전쟁의 비극은 성소의 가치와 중요성을 새로운 각도에서 이해하도록 이끌었고, 이 세상에서 사제가 어떤 소명을 실현해야할지 알 수 있게 했던 것이다.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공산 치하에서 비밀리에 운영되던 신학교에서 공부하던 힘겨운 여정을 보낸 후, 1946년 모든 성인의 대축일에 보이티와는 사제품을 받았다. 이후 2주 만에 이탈리아 로마로 유학을 떠나 윤리신학을 공부하게 된다. 로마 유학 중 그는 서유럽에 대한 안목을 갖춰가면서 빠르게 세속화되어가는 유럽의 모습과 이러한 도전들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교회의 모습도 들여다봤다. 교회가 세상을 위해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취해야할지 성찰할 수 있는 시기였다.

시골마을 신부로 첫 사목을 시작하던 때에는 누구보다 고해소에서 영적 대화를 즐겨하며 젊은이들과 함께 어울리고 토론하는 삶을 살았다. 공산 정권에는 눈엣가시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보이티와 신부는 공산 정권의 검열도 두려워하지 않고 무신론을 반박하곤 했다. 이후로도 폴란드 공산 정부는 그가 주교로, 추기경으로 서임될 때마다 극도로 반대하며 교황청에까지 공식적으로 항의했다.

그는 공산 정권 아래 폴란드 가톨릭교회가 운영했던 유일한 대학인 루블린 가톨릭대학 교수로 활동하던 중, 38세 젊은 나이에 주교품을 받았다. 폴란드 역사상 가장 젊은 나이의 주교였다.

폴란드 교회의 암흑기에 주교로서 살면서 그는 특히 젊은이들과 노동자들의 권리를 수호하는데 온 힘을 기울여왔다. 그가 지은 수십 개의 가톨릭학생회관은 늘 젊은이들로 가득 찼지만, 상대적으로 교회에 반대하는 공산 정권의 방해와 핍박도 거세졌다. 하지만 보이티와 주교는 도리어 각 본당 내 공간들을 활짝 열어 젊은이들이 국가의 검열제도 등에 구애받지 않고 문학과 학문을 배우고, 자유롭게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도왔다.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신앙교육을 위해서는 어떠한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나아가 추기경 시절엔, 그는 종교인을 넘어선 사회운동가로서 면모를 더욱 여실히 드러냈다. 가정연구소를 설립하고, 미혼모들의 자립을 돕는 ‘SOS 카롤 추기경 운동’도 그가 시작한 몫이었다. 그는 노동자들을, 특히 낙태의 위험에 맞닥뜨린 미혼모들을 돕는데 누구보다 열심히 나선 추기경으로 기억된다.

성 플로리아노 성당에서 카롤(요한 바오로 2세, 가운데줄 왼쪽에서 두 번째) 신부와 청년들.

주정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