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신나고 힘나는 신앙-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해설 (65) 8가지 참 행복 - 학교 가자

차동엽 신부 (미래사목연구소 소장)
입력일 2014-04-15 수정일 2014-04-15 발행일 2014-04-20 제 2891호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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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읽고 의지할 때 ‘행복’이 저절로 …
■ 행복은 발생하는 것

교회 울타리 밖 저잣거리에서 복음을 전하다보니, 세상 사람들이 나에게 붙여준 타이틀이 많다. 요즈음엔 ‘희망멘토’라 불러 주는 것이 대세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행복전도사’였다. 이 별칭 덕에 행복에 관해 묻는 질문도 곧잘 받는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행복이란 한마디로 무엇인가요?”다. 나의 대답은 한결같다.

“행복은 발생하는 것입니다. 영어로 행복을 뜻하는 ‘Happiness’의 어원이 ‘발생한다’는 뜻을 지닌 ‘Happen’이란 사실만 봐도 그렇습니다.…”

이 깨달음은 우리에게 값없이 행복해지는 비결을 누리게 해 준다. 실제로, 행복은 쟁취나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발생되고 창조되는 것이다. 획득은 어려워도 발생은 쉽다. 발생은 발상의 전환으로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지금 한번 미소 지어 보라. 큰 소리로 웃어 보라. 행복한 분위기를 만들어 보라. 다른 게 행복이 아니다. 바로 이러한 것들이 행복이다. ‘내가 주체가 되어 발생시킬 수 있는 것’, 그것이 행복인 것이다.

여기서 한걸음 나아가면, 행복한 ‘척’하기만 해도 행복해진다는 귀한 진실에 도달하게 된다. 이는 과학적으로 검증된 진리다.

사회 심리학자이자 하버드대 부교수인 에이미 커디는 ‘척하기’의 효과에 대해 실험하였다. 학생들을 두 집단으로 나누어 2분 동안 한 집단은 몸을 웅크리거나 구부려 ‘힘 없는 자세’를 취하게 했고, 다른 집단은 기지개를 키는 등의 ‘힘 있는 자세’를 취하게 했다. 호르몬 수치는 2분 만에 변화를 보였다. ‘힘 있는 자세’를 취한 집단은 활력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이 20% 증가하는 현상을 보였고, 스트레스 유발 호르몬인 코르티솔은 25% 감소하는 결과를 드러냈다. ‘힘 없는 자세’를 취한 집단은 테스토스테론이 10% 감소했고 코르티솔이 15% 증가했다.

행복한 표정을 짓는 것만으로도 우리 마음이 행복해지며, 그로 인해 행복한 현실이 만들어진다는 얘기다. 롤러코스터를 타지 않는 행복을 갈망하는 우리 모두가 놓치지 말아야할 대목이다.

■ 그 무엇도 ‘내 허락 없이’는

이쯤에서 어떤 독자들은 반문할지 모른다.

“아, 누가 몰라서 그래? 망해 봐, 웃음이 나오나. 회사에서 속상한 일 생겨 봐, 애들이 속 썩여 봐, 실패해 봐, 어디 가서 안 좋은 얘기 들어 봐, 표정이 굳어지는 걸 어떡해. 그런데도 웃으라고? 행복할 수 있다고?”

일리가 있는 말이다. 웃을 수 없는 상황이 있다. 우리 삶에서는 불행의 요인이라고 생각되는 일들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다.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뇌, 생활고….

이러한 때를 대비해서 우리는 항상 ‘생각’으로 무장할 필요가 있다. 내가 주장하는 행복론의 요지는 이것이다.

“그 무엇도 내 허락 없이는 나를 불행하게 만들 수 없다.”

이는 ‘테크닉’이 아닌 ‘법칙’이며 ‘원리’다. 지금껏 많은 행복 관련 서적들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했지만 글로벌 금융위기가 오면서 모두 쑥 들어갔다. 당장 경제가 어렵고, 삶이 힘든 여건에서는 테크닉적인 접근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오히려 원리를 잡았기에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우직스럽게 행복을 구가하며, 전파해 왔다.

그렇다면 그 원리란 무엇인가?

‘내 허락 없이는’이란 말을 한번 따져보자. 이 말은 무슨 의미인가? ‘허락’은 ‘이성적인 판단’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내가 이성적으로 ‘불행’이라고 인식하지만 않으면 나는 더 이상 불행하지 않다.

똑같은 데이터를 놓고 각자의 판단은 다를 수 있다. 같은 평수의 아파트에 살면서, 어떤 사람은 그 아파트를 궁전 같은 행복의 보금자리로 여기는 반면, 어떤 이는 남에게 감추고 싶은 수치의 현장으로만 간주할 수도 있다. 그 까닭을 굳이 실례를 들어 유추하자면 전자는 엊그제까지 전셋집에 살다가 방금 내 집을 마련하여 이사 온 경우이겠고, 후자는 보다 큰 평수에서 떵떵거리며 살다가 형편이 나빠져 평수를 줄여서 이사 온 경우가 되겠다. 누구의 관점이 옳은가? 정답은 없다. 다만 선택일 뿐이다.

그러기에 일어나는 모든 일 앞에서 우리가 긍정적인 생각을 견지한다면 항상 행복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밥 러셀의 책 「Money: A User’s Manual」에서 한 농부가 이에 맞장구를 쳐준다.

농부는 자기 농장 안 호수를 관리해야 하는 것이 늘 불평거리였다. 풀밭을 초토화시키는 살찐 젖소들도 이만저만한 골칫거리가 아니었다. 울타리를 치고 가축을 먹이는 일도 지긋지긋했다. 그래서 부동산 중개업자에게 농장을 매물로 내놓았다.

며칠 후 중개업자로부터 광고문을 확인해달라며 농부에게 전화가 왔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 굽이굽이 이어진 언덕이며 보드라운 목초가 쫙 깔린 곳. 깨끗한 호수로부터 자양분이 들어오고 가축은 무럭무럭 자라는 축복의 땅.”

이야기를 듣고 있던 농부가 말했다.

“마음이 바뀌었소. 농장을 팔지 않겠소. 그 땅이 바로 내가 평생 찾고 있던 땅이오.”

행복은 이미 우리 곁에 있다.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 행복학교

행복의 이치를 배우면 누구든지 어렵지 않게 행복해 질 수 있다. 그러므로 배우려는 자세가 중요하다. 고대 그리스의 서사 시인 헤시오도스(Hesiodos)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것을 스스로 깨닫는 사람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사람이요, 좋은 말을 하는 사람에게 귀를 기울이는 사람 역시 고귀한 사람이지만, 스스로 깨닫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말을 가슴속에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아무 쓸모없는 사람이니라.”

이 말의 속뜻은 이것이다. 스스로 터득하지 못할 것 같으면, 잘 듣고 배우기라도 하는 것이 상책이다!

구약시대에 행복을 설파했던 현자가 있었으니, 바로 솔로몬이다. 구약의 지혜문학이 곧 ‘행복학’인 것이다. 이는 신약까지 이어져 내려온다. 그러기에 우리는 행복의 지혜를 얻기 위해서 ‘말씀’에 의지하고 ‘말씀’을 읽는 것이다. 우리가 말씀을 제대로 공부하고 묵상하면, 참 행복이 무엇인지, 거짓 행복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아듣게 된다.

솔로몬의 지혜는 고스란히 예수님 안에서 절정에 이르게 된다. 구약 말씀의 완성인 예수님은 산상수훈의 꽃인 ‘여덟 가지 행복’의 선언을 통해 우리에게 행복의 진수를 가르쳐 주셨다. 행복선언은 그리스도인의 행복학교인 셈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한 주 한 주 등굣길에 올라 보자.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차동엽 신부 (미래사목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