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예수회 선교사 마태오 리치(Matteo Ricci·1552~1610) 신부의 선종 40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이탈리아 출신의 리치 신부는 ‘동양 선교’라는 원대한 꿈을 안고 중국 대륙에 도착, 아시아 지역 복음화에 발판을 놓은 선교사입니다.
가톨릭신문사와 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은 이를 기념하는 특별기획으로 ‘마태오 리치 선종 400주년 기념 지상 사진전’을 마련했습니다. 교황청이 지난해 ‘역사의 정점에서, 마태오 리치-로마와 베이징 사이’를 주제로 성 베드로 광장에서 특별전을 열었던 바로 그 사진들입니다. 리치 신부의 숨결과 체취가 고스란히 배 있는 사진 일부를 선정해 3회에 걸쳐 지상 중계합니다.
1492년 크리스토포로 콜롬보에 의해 신대륙이 발견된 이래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중심으로 한 서방제국들의 팽창은 약 30년간 지속적으로 전개됐다.
스페인의 왕 필립 2세와 포르투갈의 왕 세바스티안은 대륙 정복에 발 벗고 나섰고,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와 시스투스 5세 역시 식민 세력과 함께 가톨릭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선교사들을 파견했다.
휴머니즘과 르네상스에 이어 시작된 지리상의 대 발견은 유럽인들의 삶과 사고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특히 교황청의 ‘보호권’ 남용에 따른 제국들의 만행은 세계 선교를 앞둔 교회로서는 커다란 장벽이 아닐 수 없었다.
선교가 정복자들에 의해 폭력이 동반되는 가운데 불순한 동기와 뒤섞여 이루어짐으로써, 보호권 본래의 취지는 사라지고 두 국가의 정치적 야심이 서로간의 분쟁을 야기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러다보니 선교는 지배가 확고하고 현지 종교가 내적 저항을 보이지 않는 중남미에서만 원활하게 이뤄졌고, 인도·중국·일본 등 오랜 문화를 지닌 나라에서는 그리스도교가 그 기반을 확고히 할 수 없었다.
그러나 프란체스코 하비에르(1506~1552)에 의해 시작된 아시아 선교는 교회에 선교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해 주었다.
하비에르가 명왕조의 쇄국정책에 길이 막혀 중국 선교의 간절한 열망을 품고 숨을 거두던 해에 이탈리아 마체라타에서는 마태오 리치(1552~1610)가 탄생한 것이다.
리치의 부친은 약사였고 그 가문은 마체라타에서 명망 있는 가문이었다. 마태오 리치가 탄생(1552년 10월 6일)한 지 2개월여 만에 하비에르는 숨을 거두고(1552년 12월 3일), 리치는 훗날 예수회 아시아 관구장이었던 알렉산드로 발리냐노가 예견한 대로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중국 선교’를 위해 일찌감치 준비에 들어갔다.
리치는 1561년 마체라타의 예수회 콜레지움에 들어가 1566년 특별서원을 할 때까지 그곳에서 공부했다. 여기서 리치는 철학, 신학은 물론 라틴어, 그리스어, 수사학 등 인문학 관련 전 과목들, 그리고 인문과학들을 배웠다.
리치는 특별히 인문과학에 있어서는 갈릴레오의 친구이자 콜레지움 로마눔(오늘날 로마대학과 그레고리오대학의 전신) 교수로 있던 예수회의 클라비우스가 정리한 교재들을 사용했다.
클라비우스 신부는 훗날 로마에서 리치에게 직접 수학과 물리학, 천문학을 가르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