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 -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16) 로마제국의 박해

김상재 기자
입력일 2001-04-08 수정일 2001-04-08 발행일 2001-04-08 제 2244호 16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300년 박해 순교신심으로 극복
화재·정치사회적 혼란·황제권 추락 등이 계기
순교자를 산채로 불태워 ‘인간횃불’ 만들기도
처음 로마를 순례하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느끼는 것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놀라움과 반감이 아닐까 싶다.

4대성당을 비롯해 곳곳에 산재해 있는 교회 유적들의 엄청난 규모와 화려함은 이를 건축한 신앙인들의 놀라운 신앙열정을 체험케하면서도 왠지 이질감 내지는 노예문화의 산물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함께 들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이러한 의구심은 카타콤바를 순례하면서 사그라지게 될 것이다.

지상의 화려하고 웅장한 교회는 참혹한 환경 속에서 살다 스러져간 지하교회 순교자들의 신앙이라는 튼튼한 기초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으리라는 느낌, 아니 이들의 순교가 있었기에 지상교회의 영광이 가능했으리라는 것을 깨닫는데는 그리 많은 시간과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떼르뚤리아누스의 『순교자의 피는 그리스도교인의 씨앗』이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는 순간이다. 카타콤바에 묻힌 이들은 주로 네로 황제부터 종교자유가 허용되는 313년까지 근 300여년간의 혹독한 박해 속에 목숨을 잃은 순교자들이다.

원인과 근거

박해가 일어나기 전까지 그리스도교와 로마제국은 비록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서로 부딪힐수 밖에 없는 요인들을 안고 있었다.

먼저 로마인들은 병역을 노예나 무산자들에게는 부과 시키지 않을 만큼 시민의 권리요 의무라고 생각할 정도로 개인보다 국가를 절대시하는 성향이어서 하느님을 유일신으로 믿는 그리스도교와 상충될 수 밖에 없다.

아울러 황제들은 로마제국의 정치·사회적 혼란기를 맞으면 종교적 기반에서 제국의 쇄신과 내적 강화를 꾀했는데 황제숭배 같은 국가종교예배가 국가에 대한 충성의 시금석으로 강조될수록 이를 거부하는 그리스도인은 국가의 적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로마인들은 영적 세력이 인간 삶에 영향을 미친다고 믿고 있었는데 타치우스나 아우렐리우스 같은 황제들의 재위기간에 전염병, 기근, 홍수, 야만족 침입 등의 재난이 발생하자 그리스도교 반대파들은 그리스도교 때문에 신들의 분노를 사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다며 군중들을 부추키기도 했다.

뿐만아니라 그리스도교에 대한 무지도 박해의 한몫을 담당했는데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것에 대해 신자들을 식인종으로, 형제자매로서의 친교생활에 대해 근친상간하는 야만인이라는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이러한 이유 속에서 박해가 가해지지만 법치국가인 로마제국에서 박해에 대한 법적 근거는 전무하다시피하다.

112년경 비타니아 지방의 총독 플리니우스가 트리야누스 황제에게 그리스도교인에 대한 처벌을 묻는 질의서를 보낸적이 있는데 이에대한 황제의 답변이 후임 황제들의 박해의 사례가 됐다. 트라야누스 황제는 답변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을 수색하지는 말고 고발된 자들만 처벌하며 그중에서도 배교자는 용서하라』고 했다.

이에대해 떼르뚤리아누스는 『만일 그리스도교인들이 죄인이라면 왜 그들을 처벌하지않는가? 그들이 죄인이 아니고 따라서 수색할 필요가 없다면 왜 그들을 단죄하고 처벌하는가』라면서 하등의 법적 근거 없이 그리스도교인들을 박해한다고 비난했다.

박해의 과정

로마제국의 박해는 대체로 10번에 걸쳐 일어났다고 하는데 그 성격은 3기에 걸쳐 뚜렷이 구분된다.

100년경 까지의 제1기는 그리스도교에 호의적이다가 로마시 대화재 사건으로 일어난 우발적이고 산발적인 박해기이며 250년까지의 제2기는 그리스도교를 반인류적 반국가적 금지된 종교로 규정하고 신자라는 이름만으로도 처벌의 대상이 되던 시기다. 가장 조직적이고 잔인하게 시행된 250년에서 313년까지의 제3기는 로마제국의 정치·사회적 혼란을 무마시키기 위해 일어난 박해시기였다.

교회 초창기 로마제국은 속주통치의 일환으로 종교관용정책을 시행해왔고 특히 유다교에는 「허용된 종교」라는 이름으로 허용했고 유다교의 한 종파로 이해한 그리스도교도 같이 허용해왔으나 64년 7월 로마에 대화재가 일어나자 네로 황제는 그리스도인들을 방화범으로 몰아 책임을 전가시키면서 박해를 시작했다. 네로는 교회를 박해하면서 자신의 궁전을 밝히기 위해 순교자를 기둥에 묶어 산채로 불태워 소위 「인간 횃불」을 만드는 악행을 서슴치 않았다.

이 4년여에 걸친 박해때 베드로와 바울로 사도가 순교했다.

스토아 철학자이기도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자신의 재위기간 동안 일어난 기근과 페스트 등의 재난에 대한 원인을 신자들에게 돌리고 혹독한 박해를 가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가장 오랫동안 가장 참혹했던 마지막 박해의 주인공은 디오클레시아누스 황제였다. 당시 로마는 삭슨족의 반란과 게르만 족의 침입으로 국경은 불안하고 국내적으로는 군부의 반란행위가 속출하는 등 시민전쟁과 경제파탄으로 무정부 상태의 혼란기를 맞고 있었다. 따라서 황제의 최우선 급선무는 제국내 권력의 안정이었다.

디오클레시아누스는 이러한 사정으로 인하여 처음에는 비교적 관용정책을 베풀었으나 권력이 안정된 후 황제 권한의 신성화를 위해 국가종교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이에 황제는 황제숭배를 거부하는 그리스도교인들을 상대로 4번의 칙령을 발표하는 등 무자비한 박해를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결국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313년 종교자유가 허용되기에 이른다.

승리의 원인

300여년에 걸친 모진 박해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는 마침내 로마제국의 새로운 사회·통치 질서로 자리잡게 되는 승리를 거둔다.

박해를 이겨낸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먼저 그리스도교의 보편적인 교리에서 찾을 수 있다.

교회가 제시하는 인생 문제에 대한 확실한 대답과 절대적 가치는 혼란기에 의구와 회의에 빠진 이들에게 그야말로 구원의 빛이었다. 아울러 교의보다 신의 능력을 더 중요시했던 고대의 종교적 관념에서 그리스도교 표시 아래 거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승리는 박해를 종식시키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신자들의 거룩한 생활과 교회의 자선활동, 형제적 친교 나아가 순교자들이 보여준 용기와 죽음을 앞둔 불굴의 자세는 가해자들마저 감동을 받기에 충분했고 박해를 이기는 원동력이 됐다. 베드로 대성당의 화려함은 카타콤바의 실루엣이 겹칠때만 영광으로 빛날 수 있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상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