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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그리스도인] 70.여성편 (4)시에나의 가타리나

이주연 기자
입력일 2005-10-23 수정일 2005-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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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나의 가타리나는 33년이라는 짧은 생애를 살면서 정규 교육을 받지 않고 독학했지만 여성 영성의 전통 맥을 이은 것으로 평가된다.
첫 여성 ‘교회 박사’로 선언

전통 신학과 영성적 가르침 흡수

교회 장상들의 영적 지도 맡기도

교회 역사 안에서 ‘교회 박사’라는 칭호가 수여된 이는 33명으로 알려진다. 여성은 시에나의 가타리나,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 아빌라의 데레사 등 세 명이 꼽히는데 그 중에서도 시에나의 가타리나(1347?~1380)는 1970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아빌라의 데레사와 함께 여성으로서는 처음 교회 박사로 선언됐다.

아빌라의 데레사와 함께

그는 33년이라는 짧은 생애를 살면서 정규 교육을 받지 않은 독학의 상태로 12세기 빙엔의 힐데가르트, 13세기 막데부르크의 멕틸데, 14세기 스웨덴의 브리짓 등 여성 신학자들의 뒤를 이어 교회 영성사 조류에 영향을 미치고 또 여성 영성의 전통 맥을 이은 것으로 평가된다.

대단한 활동가이면서도 깊은 관상가였고 또 자신의 신비 체험을 통해 당시 정치권과 교회 장상들의 영적 지도를 맡았던 가타리나. 그녀는 전통 신학과 영성적 가르침들을 자신 안에 흡수, 통합적 지식과 영성을 형성했으며 이를 신선하고 생동감 있게 표현하는 카리스마를 보였다.

“성녀를 생각할 때 우리에게 가장 인상적인 것은 그녀에게 주입된 지혜입니다. 말하자면 이 지혜는 알기 쉽고 깊이가 있으며 천상적 진리에 관해 도취시키는 열정이자 신구약 성서 안에 담겨진 신앙의 신비를 말합니다.

이러한 동화는 분명히 가장 특이한 자연적 선물들로 인해 베풀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지혜는 또한 신비적인 은사 곧 성령으로부터 나온 지혜의 은사에 기인한 의심의 여지없는 놀라운 것이었습니다.”(교황 바오로 6세, 가타리나 성녀의 교회박사 선언 강론)

가타리나 성녀의 본명은 카테리나 베닌카사(Caterina Benincasa). 1347년 주의 탄생 예고 대축일에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 시에나에서 염색업을 하는 베닌카사 가문의 25명 자녀 가운데 막내딸로 태어났다. 그는 천성적으로 생기발랄한 성격이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6살 때 자신의 생애를 미리 보는 신비 체험을 한 일화는 유명하다. 예수님이 교화의 옷을 입은 모습으로 빛의 바다에 나타나셨는데 예수님은 수많은 성인 성녀들 무리에 둘러싸여 계셨고 그중에서 가타리나는 베드로와 바오로 그리고 요한 사도를 알아보았다고 한다.

7살 때 봉헌 결심

7살 때 이미 자신의 온 일생을 예수님께 바치기로 결심한 그는 이후 안전한 집안으로 딸을 시집보내려는 집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동정을 지키며 금욕적인 생활을 했다.

16세가 되던 해에는 만텔라테회(Mantellate, 도미니코 제3회로 이들은 수도복을 입고 가정에서 살면서 도미니코회 지도하에 병자들과 가난한 이들을 돌보았다)에 입회했으며 18살 때부터 3년 동안 독방에서 오로지 기도와 침묵으로 일관했다.

글 읽기를 터득한 것도 이 시기에 이뤄졌는데 20세가 되면서 그리스도와 ‘신비적 약혼식’을 가졌던 가타리나는 ‘교회 쇄신에 기여하라’는 깨달음을 얻고 만텔라테회 회원들과 함께 토스카나 지역은 물론 이탈리아 전역, 나아가 고국을 벗어나서까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했다.

병자간호와 특히 죄인들 개종에 힘썼던 가타리나는 흑사병 같은 전염병을 앓는 환자들에게도 벗이 되어주었다. 이는 많은 이들을 감화시켰고 또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한편 가타리나의 행동은 비판적인 사람들로부터 모략과 박해를 받기에 이르는데 이로써 도미니코회 총회 석상에 출두, 신앙을 검토당하기 까지 했다.

가타리나는 1376년 아비뇽의 그레고리오 11세를 찾아가 교황에게 대항하고 있는 피렌체인들과 화해하도록 간청, 교황이 다시 로마로 돌아오게 하는 결정적 역할을 했고 계속해서 독일과 이탈리아의 도미니코 개혁에 기여했다.

또 말년에 이르러서는 분열된 교황권과 교회 통일을 위해 매일 로마 성 베드로 성당에 가서 미사와 기도를 봉헌했다. 이외에도 하느님과의 대화와 기도, 교회 각계각층 사람들을 위한 기도 바치기와 편지 보내기 등으로 자신의 몫을 다했다.

자신의 신비적 체험을 기록한 저서 ‘대화’ 외에도 약 400통의 편지를 남긴 가타리나는 1380년 4월 29일 ‘주여, 내 영혼을 당신께 맡기나이다’라는 최후의 말을 남기고 하느님 품에 안겼다.

이탈리아의 수호 성인

“어머니가 자신의 젖으로 아이를 먹이듯 기도는 하느님께서 가까이 계시다는 것으로 우리를 먹여 기른다.”

가타리나는 기도에 있어 우리 자신의 방법에 집착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끄시도록 내어 맡겨드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분 사랑을 충분히 느끼지 못할 때라도 하느님께 마음을 두고 신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또 기도를 ‘예수님의 발에 매달리는 단계’, ‘예수님의 옆구리에 이르는 단계’, ‘예수님과 입맞추는 단계’로 구분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분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그분은 자비로우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섭리하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1416년 교황 비오 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던 가타리나는 1939년 이탈리아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됐다.

이주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