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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교회사 100대 사건 -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45) 십자군 운동

김상재 기자
입력일 2002-04-07 수정일 2002-04-07 발행일 2002-04-07 제 2293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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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라”
200년에 걸친 8차례 원정 대부분 실패
동서분열 심화·교황권과 봉건제도 쇠퇴
성도 예루살렘. 그리스도교 최고의 성지인 이 곳은 일년 내내 순례객들이 끊이지 않는다. 그 중에서도 순례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그리스도의 거룩한 무덤성전. 그러나 순례의 시각을 떠나 여행자의 눈으로 보면 이곳은 생각만큼 그리 엄숙하고 평화스럽지 못한 곳이다. 성지의 소유권과 관할권을 둘러싸고 수많은 분쟁이 오고갔으며 지금도 가톨릭, 그리스 정교회, 아르메니아 정교회, 시리아 정교회, 콥트교회, 에디오피아 정교회 등 6개 종파가 하나의 성전을 갈기갈기 찢어 소유하고 있다. 신앙을 둘러싼 모든 문제들을 상징해주는 듯하여 기분이 여간 씁쓸한 것이 아니다.

이 무덤성전을 중심으로 한 성지탈환의 대의명분 속에 교회역사상 가장 큰 종교간의 충돌이 일어났으니 그것이 바로 십자군 전쟁이다.

배경과 동기

11세기 당시 서유럽은 클뤼니와 그레고리오 7세 개혁 등에 의해 수도원 문화가 확산되었고 종교적 열성이 고양된 상태였으며 새로운 공동체 의식이 생겨났다. 그리스도교 정신은 사회전반에 걸친 기본 토대였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위협하는 요소는 전체 사회구조를 위협하는 위험이었다.

경제적으로는 상업의 발달 등으로 봉건지배 체제가 해체되고 자치도시의 독립이 진행되는 시기로 무역세계의 확대가 당면과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층민과 농민들의 생활 수준은 열악하여 생활수준이나 사회신분의 향상을 바라는 욕구나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심이 날로 점증되어갔다.

십자군 전쟁의 또 다른 중요한 배경은 기사계급의 동요였다. 끊이지 않던 제후들간의 세력다툼이 11세기 이후 사회의 안정과 함께 소멸되었으며 교회도 게르만족의 이동으로 교회 안에 유입된 호전성을 순화시키기 위해 「하느님의 평화」(Pax Dei)와 「하느님의 휴전」(Tregua Dei)이란 제도를 만들어 많은 전투 행위를 금지 시켰다.

하느님의 평화는 교회 수도원 성직자 수도자 농민 상인들의 주택과 가축을 해쳐서는 안된다는 것으로 전쟁시 비전투원의 생명을 보호해야한다는 사상이 여기서 생겼다. 또한 하느님의 휴전은 그리스도의 수난에서 부활까지를 상징하는 수요일부터 월요일 아침까지, 대축일과 그 전날 등에 전투행위를 금지시킨 것이다. 이 두 제도를 어기면 주교들은 그 나라의 모든 성사집행을 금하였다. 이렇게 되자 기사들은 전투정신을 발휘할 기회가 없었고 신분마저 위태로워졌다.

서유럽과 동로마 제국, 이슬람으로 삼분되어있던 국제정세 또한 셀주크 투르크족(터어키)의 발흥으로 균형이 깨지고 동로마 제국이 교황을 비롯한 서유럽 사회에 구원을 요청하게 됐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예루살렘의 거룩한 무덤성당이 1009년 카이로 출신의 칼리프 엘 하킴에 의해 산산조각 나버렸고 터어키가 비잔틴을 공격해 1071년 지금의 터어키 남부 만지케르트에서 비잔틴 황제를 패퇴 시킨후 예루살렘을 포함한 소아시아 지역을 완전히 정복했다. 637년부터 팔레스티나 지역은 이슬람의 세력아래 들어가 있었지만 성지순례와 그 지역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어려움은 없었다. 하지만 셀주크 투르크족이 점령한 이후부터는 성지순례가 어려워졌고 심한 박해를 받았다. 성지참배 순례는 속죄 행위로 받아들여졌고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루살렘이 최고의 순례지였던 당시 신자들에게 예루살렘 순례를 하지 못한다는 것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특히 예수님의 거룩한 무덤을 참배하는 것은 신자들의 평생 소원이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로마제국의 원정을 요청받은 서유럽이 군사를 일으키게 된 것이다. 십자군이라는 말은 전쟁 참가자들이 갈 때에는 가슴이나 어깨, 돌아올 때에는 등에 십자표시를 한 것에서 비롯됐지만 13세기 이후에야 십자군이라 불렸고 그 이전에는 「예루살렘 여행」 혹은 「거룩한 무덤 참배」라고 불렸다. 십자군은 비록 이후에 정치적 경제적 문제로 변질되기는 했지만 순수한 종교적 열정에서 시작된 무장순례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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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의 원인이 된 예루살렘의 거룩한 무덤성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무덤.
경과와 결과

1095년 동로마의 알렉시우스 1세가 도움을 요청했을 때 서유럽 프랑스의 필립 1세와 독일의 하인리히 4세는 파문 상태였다. 따라서 십자군 전쟁은 교황의 주도로 이뤄질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우르바노 2세 교황은 새롭게 고양된 그리스도교 공동체 의식으로 동로마 제국을 도움으로써 동서방 교회의 재결합을 이루고 이교도들의 손에서 성지를 되찾음으로써 그리스도교 정신으로 여러 민족들을 일치시킬 기회로 여겼다. 뿐만 아니라 점령지가 정복자의 영토가 되듯 교황 통치권의 영역을 확대해가려고 했다.

우르바노 2세는 1095년 11월 프랑스의 클레르몽 교회회의를 개최해 성지탈환운동을 전개할 것을 선언했다. 교황의 열변으로 촉발된 성지탈환의 신념은 종교 사회 경제적 요인들과 맞물려 하나의 열병처럼 유럽 전역에 퍼져나갔다. 교회는 원정기간 동안 참가자의 가족과 재산을 보호해 주는 대사를 허락했다.

이리하여 11세기말부터 13세기까지 근 200여년 동안 8차례에 걸쳐 원정이 이루어졌다. 농민십자군에 이어 기사들과 귀족들로 이뤄진 제1차 십자군이 1099년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예루살렘 왕국을 세우기도 했으나 대부분 실패로 끝났다. 영국의 사자왕 리차드와 프랑스의 필립 2세가 주도한 3차 십자군도 그리스도인들의 예루살렘 순례를 보장받는 정도로 그치고 말았다. 십자군 원정이 거듭 될수록 그 순수성도 잃어버리게 되는데 4차 원정에서는 베네치아 상인들에게 놀아나 성지회복이 아니라 오히려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해 라틴제국을 세움으로써 동서 교회의 분열을 더욱 심화시키고 회복할 수 없게 만들기도 했다. 이처럼 십자군 운동은 원정이 거듭될수록 신앙의 순수한 열정이 퇴색되고 변질된 채 엄청난 희생에도 불구하고 군사적으로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교황의 주도로 이뤄진 십자군은 초기에는 교황권의 신장을 가져왔지만 궁극적으로 십자군이 실패함으로써 교황권이 쇠퇴의 길로 들어서는 동시에 유럽의 종교적 열정도 식었다. 또한 영주들이 십자군 원정에 나선 후 영지관리를 소홀히 하게 되고 경제적으로 쇠퇴하자 봉건제도가 무너지고 왕권이 절대화하는 한편 공동체의식이 강화돼 민족의식 내지는 국민의식이 싹트기 시작함으로써 서유럽사회가 근대로 넘어가는 계기가 마련됐다. 또한 동방과 이슬람 문화와의 접촉은 학문을 증진시켜 스콜라학의 발전을 가져왔다.

중세의 특성을 가장 뚜렷하게 드러낸 역사적인 대사건인 십자군 운동은 복음선포는 그 수단도 복음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김상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