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희생자들에게는 하늘나라에서의 영원한 안식을, 10년을 100년처럼 가슴앓이한 유가족들은 당신께 모든 것을 의지하고 고통을 이겨낼 수 있도록 위로와 힘을 주소서.” 세월호 10주기를 하루 앞둔 4월 15일 광주대교구 산정동 준대성전에 세월호 희생자의 넋을 기리고 유가족들을 위로하는 기도가 울려 퍼졌다. 세월호가 수년째 거치돼 있는 목포신항을 내려다보는 자리에서 봉헌된 미사에서는 세월호 희생자 304명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호명하며 ‘기억’을 다짐하고 ‘연대’를 약속하는 뜻깊은 시간도 마련됐다.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위원장 김선태 요한 사도 주교)는 이날 김선태 주교 주례로 ‘세월호 참사 10주기 미사’를 봉헌했다. 미사에는 광주대교구장 옥현진(시몬) 대주교, 서울대교구장 정순택(베드로) 대주교, 주교회의 사회주교위원회 위원장 문창우(비오) 주교, 덕원자치수도원구 자치구장 서리 박현동(블라시오) 아빠스 등과 광주, 대전, 마산, 부산, 서울, 수원, 안동, 인천, 의정부, 전주교구 소속 정의평화위원회 사제단, 신자 등 900여 명이 참례했다. 세월호 참사로 목숨을 잃은 고(故) 김웅기(제준 이냐시오) 학생의 어머니 윤옥희(데레사)씨와 고(故) 이태민 학생의 어머니 문연옥씨도 미사에 함께 했다. 성당을 가득 메운 참례자들은 참사의 진상을 명확히 규명하고 앞으로 세월호와 같은 사회적 참사가 되풀이되지 않는 안전한 나라, 생명을 존중하는 문화를 만드는데 한뜻으로 함께할 것을 다짐했다. 주교단과 사제단, 신자들은 미사 후 위령기도를 바치며 세월호 희생자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길 기도했다. 김선태 주교는 미사 강론에서 “존엄하고 소중한 존재인 세월호 희생자 한 분 한 분을 기리고 정성껏 기억하기 위해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맞아 발표한 주교회의 사회주교위원회의 담화에 희생자 304명 한 분 한 분의 이름을 담았다”며 “오늘 이 자리에서 그분들의 소중한 이름을 정성껏 부르는 것은 유가족들의 슬픔과 고통에 진심으로 함께 연대하고, 비극적인 참사의 진실 규명에 최선을 다하는 길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강론에 이어 사회주교위원회 위원장 문창우 주교는 ‘세월호 참사 10주기’ 담화를 낭독했다. 이어 미사를 공동집전한 주교들은 번갈아 제대 앞에 서서 단원고 학생과 교사 등 희생자 304명의 이름을 참례자들과 함께 불렀다. 참례자들은 북받치는 감정에 눈시울을 훔치면서도 희생자들의 이름을 끝까지 호명하며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영성체 후 유가족을 대표해 인사말을 전한 윤옥희씨는 “왜 참사가 일어났고 왜 진상규명이 안 되고 있는지 밝히기 위해 사회적 참사를 겪은 피해자 연대인 ‘재난참사피해자연대’를 꾸려 활동하고 있다”며 “또 다른 참사로 더 이상의 피해자와 유가족이 나오지 않도록 생명을 존중하는 안전사회를 만드는 일에 끝까지 함께 하겠다”고 전했다. 이어 “부족한 부모와 함께해 준 이냐시오에게 이 자리에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다”며 “지금 이날까지 힘이 되어 주신 모든 분들의 안녕과 평화를 빈다”고 덧붙였다.

2014년 봄, 처음에는 슬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모든 것이 다 멈춰버린 기분, 정지버튼을 누른 듯 멈춘 채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는 그런 상태. 죽는다는 것이 이런 기분일까 싶었다. 그러나 정작 죽은 것은 자신이 아니었다. 언제 어디서나 붙어 다녔던 단짝 친구, 함께 신부가 되자며 꿈을 나누던 그 친구는 세월호를 타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그럼에도 멈춘 듯했던 시간은 흘렀고, 올해도 다시 불어온 봄바람에 어김없이 벚꽃이 나부꼈다. “딸랑.” 수원가톨릭대학교(이하 수원가대) 교정에서 만난 수원교구 심기윤(요한 사도) 부제는 문득 종소리가 들리는 언덕 위를 바라봤다. 세월호 희생자 고(故) 박성호(임마누엘)군의 이름을 딴 임마누엘경당에 달린 풍경(風磬)이 낸 소리였다. 심 부제는 “교정을 거닐며 기도하다가 종소리가 울리면 성호가 찾아온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며 미소 지었다. 세월호 참사로 함께 사제의 꿈을 키우던 친구를 떠나보내고 10년 동안 사제의 길을 준비해온 심 부제를 임마누엘경당에서 만났다. ■ 친구 대신 온 경당 처음 만난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심 부제와 성호는 늘 함께였다. 학교는 달랐지만 방과 후엔 늘 함께였고, 성당에서는 당연하다는 듯 곁에 있었다. 단짝 중의 단짝. 어찌나 둘이 붙어 다녔는지, 주일학교 선생님들은 캠프나 프로그램 중에 모두가 어울릴 수 있도록 어떻게든 두 사람을 떼어 놓느라 애를 써야 했을 정도다. 늘 함께였고, ‘사제’라는 꿈도 함께 꿨다. 심 부제는 성호와 함께 꾸던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신학교에 왔다. 그러나 성호는 오지 못했다. 성호의 이름을 담은 경당만 신학교에 왔다. “참사 후에는 슬픔과 분노가 가득했고 세상이 차갑게만 보였어요. 그런데 임마누엘경당이 지어지는 과정을 보면서 희망을 바라보게 됐던 것 같아요.” 심 부제는 2014년 경당이 처음 지어지던 때를 떠올렸다. 왜 성호에게, 친구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야 했는지에 대한 분노와 원망, 절망이 가득했던 그 시기. 안산 세월호 합동분향소 앞마당에 작은 나무 경당이 세워지고 있었다. 성호의 꿈을 대신 이뤄주고자 ‘세월호가족지원네트워크’를 비롯한 수많은 시민이 함께했다. 하루하루, 나무판자가 세워지더니 지붕이 올라가고, 종이 달렸다. 심 부제는 그렇게 경당이 완성되기까지 정말 많은 사람의 손이 거쳐 가는 과정을 지켜봤다. “정말 많은 분들이 자신의 시간과 공간 안에서 잊지 않고 기억하려고, 슬픔을 함께하려고, 이겨내려고 애쓰고 있는 것을 느꼈어요. 그들의 작은 사랑 하나하나가 크게 와 닿았고요. 절망의 유효기간은 짧고, 희망이 왜 희망인지를 배웠어요.” 2018년 안산 세월호 합동분향소가 철거되면서 임마누엘경당도 철거될 위기에 처했다. 이에 당시 안산대리구와 수원가대가 성호의 꿈을 담은 이 경당을 성호가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신학교, 수원가대 교정에 이전하면서, 경당은 이곳에 자리 잡았다. 경당 옆에는 팽목항에 서 있던 세월호 십자가도 있다. 마찬가지로 팽목항에서 철거된 십자가를 수원가대가 2017년 교정에 받아들였다. 수원가대는 세월호 십자가를 경당 옆으로 옮겨 경당과 십자가 인근을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공간으로 조성했다. 경당 부근에는 벚꽃이 많아 봄이면 신학생들에게 인기 있는 벚꽃 명소다. 성호 대신 온 경당. 심 부제는 “경당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면서도 “슬픔과 위로가 공존하는 장소”라고 했다. 볼 때마다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성호와 친구들이 떠올라 슬프지만, 또 기도 안에서 위로를 받기 때문이다. ■ 함께 걷는 사제로의 길 “신학교 저학년 때는 ‘내가 성호 몫까지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런데 고학년이 되면서 그런 생각이 사라졌습니다. 성호가 그걸 원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으니까요. 제가 하느님 안에서 기쁘게 사는 게 성호가 원하는 것일 거예요. 성호는 그런 친구예요.” 단짝 성호가 떠난 지 10년이지만, 사제의 길을 향해 걷는 심 부제에게 성호는 여전히 곁을 함께하는 친구다. 그러나 친구의 몫을 대신 지고 간다는 생각은 없다. 심 부제에겐 이 길을 기쁘게 가는 것, 그게 성호가 바라는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 누구보다 성호와 단짝이었던 심 부제이기에 안다. 심 부제는 “만약 성호가 사제의 길을 걸었다면 아마 누구보다도 잘 살았을 것이라 생각한다”면서 “친구라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예수님이 제 인생의 롤모델이시지만, 성호는 또 다른 롤모델이었다”고 말했다. “가난하고, 고통 받고, 버려지고, 또 슬퍼서 울어야 하는데 울지 못하는 그런 사람들 곁에서 때로는 같이 울고, 때로는 위로하고, 또 그 안에서 다시 웃을 수 있게끔 힘을 주는 사제가 되고 싶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제게 많은 신부님들이 그래주셨듯이 저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세월호 참사 이전에도 사제의 꿈을 꿨지만, 세월호 참사는 심 부제에게 어떤 사제로 살 것인가에 대한 모습을 보여줬다. 세월호 참사로 성호를 비롯한 여러 친구들을 잃고, 심 부제의 삶은 슬픔으로 가득 찼다.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는 시간 속에서 상처는 더 깊어졌고, 마땅히 울어야 했지만, 울지도 못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하느님은 어디 계신가’란 한탄이 저절로 튀어나오는 시간. 그 속에서 많은 이들이 심 부제 곁에 있었다. 심 부제는 “많은 신부님들이, 수녀님들이, 신자분들이 곁에 계셨는데, 사실 그분들 성함이나 세례명도 기억하지 못한다”면서 “그러나 그분들을 통해 곁에 하느님이 계시는구나 하고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저도 그분들처럼 제가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기억하게 해주는 신부님이 되고 싶다”고 밝혔다. 지난해 12월 부제품을 받은 심 부제는 이제 사제품을 받기 위한 마지막 과정을 밟고 있다. 성호가 떠난 지 10년, 사제로서 새롭게 길을 걷기 위해 다시 힘을 낸다. 그리고 그 길은 더 이상 혼자 걷는 길이 아니다. “성호야, 내 친구여서 고맙다. 그동안 표현은 못했지만, 사랑한다.”

서울대교구 이경상(바오로) 주교의 서품식이 4월 11일 오후 2시 서울 주교좌명동대성당에서 거행됐다. 이 주교는 서품식을 통해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주님의 양 떼를 다스리며 목자의 역할을 수행할 것을 다짐했다. (관련 기사 10~11면) 서품식은 1부 주교 서품 미사와 2부 축하식으로 진행됐으며 미사는 서울대교구장 정순택(베드로) 대주교 주례, 전국 주교단 공동 집전으로 봉헌됐다. 염수정(안드레아) 추기경과 교황대사 직무 대행 페르난도 헤이스 몬시뇰, 주교회의 의장 이용훈(마티아) 주교를 비롯한 32명의 주교가 자리를 함께했다. 또 서품식에는 문화체육관광부 유인촌(토마스 아퀴나스) 장관, 국가보훈부 강정애(율리안나) 장관, 오세훈(스테파노) 서울특별시장 등 정계 인사와 배우 이윤지(마리아)·지진희(요한)·차승원(요한)씨 등 문화예술인들도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아울러 서품식이 거행된 주교좌명동대성당 대성전 외에 꼬스트홀에도 참례자들이 좌석을 메워 새 보좌주교 탄생을 기뻐했다. 주교 서품 예식은 페르난도 헤이스 몬시뇰이 프란치스코 교황의 임명장을 신자들에게 보여준 후 교구 사무처장 정영진(도미니코) 신부가 내용을 낭독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이어진 훈시에서 정순택 대주교는 “이제 사람들 가운데서 뽑혀 사람들을 위해 하느님의 일을 하도록 세워졌음을 기억하고, 주교직은 영예가 아니라 임무를 가리킨다는 것을 명심하라”고 당부하고 “주교는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봉사해야 하며, 작은 사람 봉사자가 되어야 하며 맡겨진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고 희생 제사를 바치라”고 전했다. 계속해서 주교로 선발된 이의 서약, 성인 호칭 기도, 안수와 주교 서품기도, 도유와 복음서 수여가 진행됐고 주교 표지인 주교 반지와 주교관, 목장이 수여가 뒤따랐다. 이 주교는 주례 주교인 정순택 대주교 및 모든 참석 주교와 평화의 인사를 나누면서 주교 서품 예식을 끝맺었다. 이 주교는 미사 후 열린 축하식 답사에서 “한순간도 주님께서 교회를 떠나시거나 비우신 적이 없이게 걱정이 없다”면서 “하느님 사랑이 가득한 이 어머니 교회에서 주님의 영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 겪는 일상에, 특히 노고와 고통과 애환에 조금 더 감수성과 연민을 갖고 살아가겠다”고 말했다. 아울러 “그 무엇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다는 것을 진리로 믿는 그리스도인답게, 우리 모두 그분 지체로서 내 안에 주님의 마음을 담아 서로 연민하며 돌보고 따스하게 살아가자”고 밝혔다. 서품식 준비위원장을 맡은 교구 총대리 구요비(욥) 주교는 감사 인사에서 “이경상 주교님은 그간 여러 중책을 많이 맡으시며 책임감 있게 헌신적으로 사는 모습을 보여주셨다”며 “주교님의 사목 표어처럼 온 교구가 예수님 마음 살기에 함께해 성령의 아름다운 열매를 많이 맺기를 진심으로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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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교회의 사회주교위, 세월호 참사 10주기 담화 발표

주교회의 사회주교위원회(위원장 문창우 비오 주교)는 4월 16일 광주대교구 산정동 준대성전에서 봉헌된 세월호 참사 10주기 미사 중 ‘그 가운데 하나도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신다’(루카 12,6 참조)를 제목으로 세월호 참사 10주기 담화를 발표하고, “세월호 참사에 대한 기억은 그 근본 쇄신책이 마련되기 전까지는 끝낼 수도 없고 끝내서도 안 된다”며 “우리는 정부의 재발 방지 대책 수립으로 다시는 그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염원한다”고 밝혔다. 문창우 주교와 사회주교위원회 위원 정순택(베드로) 대주교, 조규만(바실리오) 주교, 김선태(요한 사도) 주교, 유경촌(티모테오) 주교, 박현동(블라시오) 아빠스 공동 명의의 담화에서 사회주교위원회는 “무엇보다 먼저 세월호와 함께 차가운 바닷속에 스러져 간 삼백 네 분의 고귀한 영혼들을 기억하며 이제 따뜻한 하느님의 품에서 영원한 평화를 누리기를 기원한다”며 “아울러 사랑하는 이를 가슴에 품고 피눈물로 십 년을 백 년같이 지냈을 유가족들과 생존자들에게 하느님의 위로와 평화가 가득 내리기를 빈다”고 전했다. 이어 사회주교위원회는 "참사 당시 다시는 유사한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정부에 뼈아픈 자성과 환골탈태를 요구했음에도 최근까지 그와 비슷한 사회적 참사가 반복되고 있는 것을 보면 세월호 참사는 아직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며 “이에 우리는 정부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고 국정을 운영하여 주기를 다시 한번 촉구한다”고 밝혔다. 사회주교위원회는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맞이해 교우 여러분에게 ‘사회적 약자를 향한 열린 마음과 연대’를 호소한다”며 “우리가 세월호 참사로 소중한 목숨을 잃은 희생자 유가족들의 깊은 슬픔과 고통을 헤아리며 그들의 손을 잡아 준다면, 그들은 위로받고 용기를 얻으며 세상은 더욱 따뜻해질 것”이라고 전했다. 이어 「모든 형제들」 186항을 인용해 “세월호 참사로 말미암아 ‘고통받는 사람 곁에 있어 주는 것’과 ‘그러한 고통의 원인이 된 사회적 조건들을 바꾸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숭고한 소명”이라며 “세월호 참사 이후를 사는 우리가 더 나은 내일을 위해 힘을 모으기로 다짐하고 부활하신 주님의 찬란한 빛이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이들을 감싸기를 기원한다”고 밝혔다. 한편 사회주교위원회는 존엄하고 소중한 존재인 세월호 참사 희생자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기억하는 의미로 이번 담화에 304명의 사망·실종자 명단을 모두 담고, 이날 미사 중 희생자들의 이름을 모두 불렀다.

성물, 망가지거나 안 쓰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가톨릭교회는 예술작품을 통한 신앙심 전파에 적극적이다. 그렇기에 미술이 발달했고, 신심행위와 기도를 돕기 위해 성물 사용을 권장한다. 그렇기에 각 가정에서는 다양한 성물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많이 보유하고 자주 사용하는 만큼 부서지거나 낡아지는 성물 또한 적지 않다. 부서진 성상, 안 쓰는 묵주 등 집에 그냥 두기 어려운 성물들을 알맞게 처리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폐 성물 처리에 대한 교회의 명확한 가르침은 없다. 하지만 잘게 부수어 깨끗한 땅에 묻거나 일반 쓰레기로 버리는 방법이 널리 알려져 있다. 성물 그 자체를 너무 신성하게 여기면 안 되지만, 악용될 여지가 있어 아무렇게나 버려서도 안 된다. 그렇다면 이런 폐 성물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신자들은 폐 성물 처리 방법이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특히 망가지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 쓰지 않아 버리려는 성물 처리는 더욱 힘들다. 축복까지 받은 성물을 막상 부수는 것이 내키지 않는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서재희(엘리사벳·68·수원교구 서부본당)씨는 “내 사유지가 아닌 이상 깨끗한 땅을 찾아 묻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며 “거룩하게 모셨던 것을 내 손으로 부수거나 더러운 일반쓰레기와 함께 버리기도 꺼려져서 처리 비용을 받고라도 어디선가 수거해 주면 좋겠다”고 밝혔다. 예수회 박종인(요한) 신부는 “축복받았던 성물을 일반쓰레기로 폐기하는 건 어려울 듯하다”는 견해를 전하며 “교회 차원에서 폐기 시스템이 갖춰지면 신자들이 반길 것”이라고 덧붙였다. 전에는 파손되거나 훼손된 성물을 사순 시기 등에 본당 사무실에서 모았다가 교회 묘지에 묻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전통은 현재 많이 사라진 실정이다. 이런 가운데, 서울 행당동본당(주임 소원석 가브리엘 신부)은 주보 공지를 통해 4월 14일까지 안 쓰는 성물을 수거하고 있다. 평소 신자들의 요청이 반영돼 각 가정에 방치된 십자고상, 성상, 묵주 등 폐 성물을 본당에서 일괄 처리키로 한 것이다. 행당동본당 관계자는 “현재 성모상, 묵주 등의 폐 성물이 모였다”며 “신자들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전했다. 폐 성물을 재활용하는 경우도 있다. 안동교구 문경 힐링휴양촌 명상센터(담당 정도영 베드로 신부)는 안 쓰는 성상이나 묵주를 받고 있다. 성상은 부순 뒤 콘크리트를 섞어 블록을 만들어 인근 한실성지 보수 등에 쓴다. 정도영 신부는 “신자들이 성물 폐기에 어려움을 느끼는 것에 공감하며 폐 성물을 받기 시작했다”며 “성물을 판매한 곳에서 처리 방안도 고민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광주에 제주 4·3 희생자 기억 ‘4월걸상’ 놓여

제주 4·3 희생자를 기억하기 위한 ‘4월걸상’이 광주에 세워졌다. 제주 밖 육지에 세워진 최초의 4·3 조형물이다. 인권연대 오월걸상위원회(공동대표 김희중 히지노 대주교)는 4월 2일 광주 광산문화예술회관 광장에서 ‘4월걸상’ 제막식을 열었다. 제76주년 제주 4·3 희생자 추념일을 하루 앞두고 열린 행사에는 전 광주대교구장 김희중 대주교, 전 제주교구장 강우일(베드로) 주교, 박병규 광산구청장, 제주4·3희생자유족회, 5·18기념재단, 오월어머니회 회원 등 70여 명이 참석했다. ‘4월걸상’은 제주에서 활동하는 강문석 작가 작품으로 작품명은 ‘민중의 힘’이다. 제주 4·3 학살을 상징하는 총알이 꺾인 모습을 형상화하고 꺾인 총알 아래는 민중의 힘을 상징하는 제주 몽돌을 놓았다. 거친 시간을 견뎌내며 몽돌은 작아졌지만 결국 민중의 힘이 모여 제주 4·3의 폭력을 견디고 이겨낸다는 의미를 담았다. 제주 4·3의 상징인 동백꽃을 동선으로 각인했고 곁에는 ‘제주 4.3, 오월 광주’라는 글귀를 새겨넣었다. 4월걸상 건립 비용은 100% 광주시민들의 모금으로 이뤄졌다. 지난해 5월 제주도민들이 마음을 모아 광주 5.18을 기억하는 ‘오월걸상’을 제주 서귀포시청 앞에 세운 것에 화답하고자 광주시민들이 이번 조형물 설치에 힘을 보탰다. 김희중 대주교는 인사말에서 “앞으로 우리나라의 어떠한 지역에서라도 부당하게 광주 5·18과 제주 4.3 같은 국가폭력이 자행되는 것을 막아야 할 것”이라며 “이번 광주와 제주의 연대를 통해 국민 모두가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동포애와 애국심을 공유하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고 전했다. 강우일 주교는 축사를 통해 “제주에 광주 오월걸상을 설치하고, 광주에 제주 4월걸상을 설치하는 것은 우리 역사 안에 자라온 폭력의 확산과 승계를 차단하고 인간 존중과 평화의 연대를 강화하는 희망찬 상징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인권연대는 광주 5·18 정신을 전국화·현재화하기 위해 지난 2017년 3월 20일 ‘오월걸상추진위원회’를 출범하고 현재까지 부산, 목포, 서울 주교좌명동대성당 앞, (구)경기도청 앞, 마석 모란공원 입구, 서귀포시청 등 전국 여섯 곳에 오월걸상을 세웠다.

[저를 보내주십시오] 함제도 신부(하)

메리놀 외방 전교회 함제도(Gerard E. Hammond·90) 신부는 북한에 62회 다녀오는 등 북한 선교를 적극적으로 펼쳤다. 특히 환자들을 돌보는 데 열심이었다. “선교는 로맨스이지만 북한과의 선교는 짝사랑 같다”는 함 신부. 지금도 북한으로 '저를 보내주십시오'라고 말하는 함 신부의 북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파디 주교와의 약속, “꼭 북한에서 봉사” 메리놀 외방 전교회는 1923년부터 북한 지역에 선교사 파견을 시작했다. 함제도 신부는 한국 부임 초기 초대 청주교구장 제임스 파디 주교(야고보·1898~1983)의 비서를 지냈다. 파디 주교는 1932년 평양교구 비현본당 보좌를 시작으로 의주본당 주임을 지내다 일제에 추방됐다가 6·25전쟁 때 다시 한국에 들어왔다. 파디 주교는 함 신부에게 매일 북한 선교에 대해 이야기했다. “지금의 상황도 그렇고 우리는 이제 북한을 갈 수가 없어요. 나중에 꼭 북한에 가서 한민족을 위해서 봉사해 줬으면 좋겠어요.” 함 신부는 그때마다 주교님께 꼭 북한에 다시 가 선교하겠다고 답했다. 함 신부는 청주교구 시절부터 북한과 인연이 꽤 닿았다. 6·25전쟁 이후 충청북도에 성당이 감곡과 청주, 제천, 충주 교현, 옥천 등 5개가 있었는데, 5개 성당 모두에 북한에서 온 신부들이 사목하고 있었다. “피난민 중에 북한에서 신앙생활을 하다 피난 온 신자도 많았어요. 본당의 일을 돕는 분, 식사를 준비하거나 빨래를 도맡아 하시는 자매님들도 북한이 고향인 분들이었죠.” 북한 선교의 시작 1989년 메리놀 외방 전교회 한국 지부장으로 발령받은 함 신부는 본격적으로 북한 선교에 나섰다. 함 신부는 현재까지 북한에 총 62번 다녀왔다. 1년에 세 번꼴. 1990년대에는 북한에 가는 법이나, 가는 길을 아는 사람, 북한과 접촉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김수환 추기경님께 북한에 가고 싶다고 말씀드렸어요. 추기경님이 참 좋은 생각이라고 화답하셨죠.” 첫 방문은 매우 힘든 과정을 거쳐야 했다. 우선 미국 여권이 필요했고 중국 베이징의 미국 대사관에서 비자를 받은 후 비행기 표를 구입하고 하룻밤 묵은 후에야 북한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행여 반역자로 몰릴까 걱정도 됐다. 한국에서 사목하는, 그들이 원수라고 부르는 미국인 신부를 달갑게 보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첫 방문 때는 무척 긴장했었죠. 하지만 그곳의 여러 사람과 만나며 이들이 한 민족이라는 생각을 갖게 됐고 점점 더 마음이 편해졌어요.” 1996년 방북 때는 고(故)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이 미화 5000달러가 든 봉투도 준비해 줬다. 김 추기경뿐 아니라 고(故) 정진석(니콜라오) 추기경, 염수정(안드레아) 추기경, 유흥식(라자로) 추기경과 주교들, 전국 각 교구와 카리타스, 가톨릭구제회(Catholic Relief Service)도 북한 돕기에 관심이 많았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2014년 방한했을 때 함 신부에게 “(북한에) 꼭 가자”고 말했다. 낙하산이라도 타고… “내년에 평양에서 우리 같이 하자” 북한에서의 가장 안타까운 기억은 회복이 어려운 환자들의 콜록거리던 기침 소리였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꿈에서까지 생각났다. 콜럼버스 기사단(Knight of Columbus)에서 받은 기금으로 북한에 호스피스 건물도 지었다. 함 신부는 “환자들이 나아 퇴원할 때가 가장 기쁜 날”이라며 “환자들의 집까지 동행해 마을 잔치를 벌이기도 했다”고 전했다. 그러다 분단 전 가톨릭교회가 운영하는 유치원을 다녔다는 할머니들을 만나면 마음이 울컥하기도 했다. “내년에 평양에서 우리 같이 하자.” 함 신부는 입버릇처럼 말하곤 한다. 바로 유다인들이 흩어져 살 때 “내년에 우리 예루살렘 간다”고 말했다는 데서 비롯됐다. 앞서 “선교는 로맨스”라고 했지만 북한 선교는 짝사랑 같다고 함 신부는 말했다. 짝사랑이 해주는 가장 맛있는 음식으로는 냉면을 꼽기도 했다. 함 신부는 “지금은 북한에 못 가니까 낙하산으로라도 가면 좋겠다. 북한에도 속으로는 하느님을 믿고 있는 신자들이 있을 것”이라고 희망을 비쳤다. 북한에서 하고 싶은 것 함 신부는 북한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다면 “메리놀회가 선교를 시작한 평양교구의 신의주부터 평양시, 평안북도와 평안남도를 꼭 방문하고 싶다”고 말했다. 파리 외방 전교회 두봉 주교와 함께 북한에 갔을 때다. 다 함께 묵은 변두리 호텔에서, 파리 외방 전교회 신부와 메리놀 외방 전교회 신부가 함께 선교사 생활을 하면서 지내면 좋겠다는 말이 나왔다. 함 신부는 그 염원을 담아 그곳에 조그마한 요셉 성인상을 하나 묻었다. 또 함 신부는 6·25 전쟁 중 공산군에 체포돼 중강진에서 순교한 패트릭 번(P. J. Byrne·1888~1950) 주교의 시신을 모셔오고 싶다는 바람도 내비쳤다. 북한 선교를 위해 현재 준비 중인 교구 사제들에게 전하는 메시지에서도 “북한에 갈 때 나도 불러달라”는 말을 남겼다. 한반도가 지고 있는 십자가를 위해… “서로 사랑하세요” 한국에 온 지 64년, 많은 것이 달라졌다. 함 신부는 “북한은 물질적으로 어렵지만 한국은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한국이 전쟁 후에는 함께 뭉쳐서 살았는데 살기 좋아지면서 서로 무관심해졌다”고 걱정스럽게 말했다. 이 시대의 한국은 심리적 고통으로 자살하는 사람들이 늘었으며 많은 이가 불평과 원망 때문에 기쁨을 잃어버린 것 같다고 우려했다. 본인은 먹을 것이 없어도 손님에겐 식사를 권하던 시절의 인사나 배려가 사라졌음을 피부로 느낀다. 함 신부는 민족의 화해와 대화, 평화를 바라며 ‘한국’, ‘북한’보다 ‘한반도’(코리아)라는 단어를 많이 쓴다. 함 신부는 “통일까지는 어렵더라도 전쟁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면서 “같은 역사를 가진 같은 민족으로서 내가 한국에서 기쁘게 사는 것처럼 북한에서도 평화스럽고 편안하게 살 수 있기를 바란다”는 소망을 밝혔다. “한민족은 순교자의 후손”이라며 희생정신을 강조한 함 신부는 북한에 대한 한국인들의 적대감이나 무관심을 타파하고 계속 기도할 것을 강조했다. 함 신부는 한국에서의 64년 선교사 인생을 한마디로 함축하며 가톨릭신문 독자들에게 인사를 전했다. “서로 사랑하세요. 서로 관심을 가지세요.”

종합

“오늘은 형제님들이 요리사”

본당 남성 단체를 활성화하고 냉담 교우를 신앙생활로 이끌기 위한 이색 대회를 연 본당이 있어 눈길을 끈다. 서울 연희동본당(주임 류시창 베드로 신부)은 4월 7일 본당 남성 신자를 대상으로 친목과 화합을 다지는 연령별 요리대회를 열었다. 대회에는 연성회(70대), 대건회(60대), 양업회(50대), 하상회(40대), 청년회 다섯 개 팀 30여 명이 참가해 요리 실력을 뽐냈다. 이날 대회에는 참가자 외에도 사목회 등 신자 150여 명이 참석했다. 대회는 참가자들이 지정 요리(오징어볶음과 아귀찜 중 택1)와 자유 요리(두 가지)를 정해진 시간 내에 완성하면 심사단이 맛을 보고 순위를 매기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심사는 협동성과 재료 준비성, 맛 등 5가지를 기준으로 식당을 운영하는 본당 신자 세 명이 맡았다. 대회 1등은 하상회가 차지했다. 하상회 김남호(미카엘·44)씨는 “다른 팀이 잘 안 할 것 같으면서도 호불호 없는 튀김류인 꿔바로우를 준비했는데 다들 맛있어했다”며 “팀원이 같이 협동해 완성한 음식이라 더 의미가 깊다”고 1등 소감을 밝혔다. 참가자들을 비롯한 본당 신자들은 시상식이 끝나고 대회서 조리된 음식을 다 함께 나눠 먹으며 친교의 시간을 가졌다. 요리대회를 준비한 전대훈(이냐시오) 기획분과장은 “비교적 활발하게 활동하는 여성 신자들과 달리, 남성의 경우 냉담 비율도 높고 구역별·연령별 소통도 부족해 본당 차원에서 고민이 많았다”며 “남성 단체를 활성화하고자 하는 본당 움직임에 발맞춰 남성 연령별 요리대회를 준비했다”고 말했다.

“한 끼 100원씩 모아 이웃 돕기 나서요”

서울 신대방동본당(주임 박근태 베네딕토 신부)이 매월 첫째 주에 ‘한 끼 감사 100원 저금통 모으는 날’을 진행해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을 꾸준히 돕고 있다. 신대방동본당이 ‘한 끼 감사 100원 저금통 모으는 날’을 시작한 것은 2008년 10월로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본당의 전통으로 자리잡고 있는 자선 실천 활동이다. 본당 신자들은 한 끼에 100원씩 절약한다는 마음으로 한 달 동안 모은 성금을 토요일 저녁 주일미사부터 주일 매 미사 때 성당 입구에 마련된 헌금함에 자유롭게 봉헌하고 있다. 4월 ‘한 끼 감사 100원 저금통 모으는 날’이 진행된 4월 6~7일 주일미사에도 많은 신자들이 사랑 나눔에 동참했다. 매월 평균적으로 150명 안팎의 신자들이 120~150만 원을 봉헌하고 있다. 신대방동본당 안근숙(가타리나) 사회사목분과장은 “과거에는 신자들에게 저금통을 나눠 드린 뒤 매월 회수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사회사목분과 봉사자들이 주일미사 전후에 성당 입구에 헌금함을 설치해 접수하는 방식으로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모인 성금은 재가 노인이나 장애인 복지를 위해 연 4회 지급하고 있는 것을 비롯해, 김장김치 나눔, 홀로 거주하는 이들을 위한 월 1회 반찬 나눔에 사용한다. 본당은 한 끼 감사 100원 성금을 꼭 필요한 이웃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구역장과 반장들로부터 지원 대상자 추천을 받고 있다.

[새 성당 봉헌 축하합니다] 대구대교구 기계본당

대구대교구 기계본당(주임 최재원 펠릭스 신부)이 4월 20일 오전 10시30분 경북 포항시 북구 기계면 기계로 240번길 2 현지에서 교구장 조환길(타대오) 대주교 주례로 새 성당을 봉헌한다. 새 성당은 대지면적 3951㎡, 연면적 839.09㎡ 크기로 성당동과 교육관동, 사제관동 등 3개 동으로 구성된 지상 1층 철근콘크리트 건물이다. 성당동은 150석 규모이며, 교육관은 사무실, 교리실, 강당, 화장실 등으로 구성돼 있다. 기계본당은 1968년 설립된 기계공소로 출발해 2009년 9월 4일 본당으로 승격됐다. 승격 당시 약 139㎡ 규모 조립식 패널 공소건물에서 시작한 본당은 초대 주임 김호균(마르코) 신부부터 2대 주임 배성수(라우렌시오) 신부, 현 주임 최재원 신부까지 15년 동안 모든 주임신부와 신자들이 새 성당 건립 기금 모금을 위해 42곳 본당을 찾아다니며 도움을 호소했다. 본당 신자들은 각자 형편에 맞춰 건축기금을 부담했으며, 수시로 2차 헌금에 동참했다. 봄이면 산에서 산나물을 캐고, 가을이면 김장용 배추를 절였다. 또 수시로 식혜와 밑반찬을 만들어 판매했다. 전 신자가 은인들을 위한 미사와 새 성당 건립을 위한 기도문 등 수많은 기도를 봉헌하며 영적으로도 큰 힘을 보탰다. 주임 최재원 신부는 “새 성당 봉헌을 위해 지난 15년 동안 있었던 하느님의 도우심과 본당 신자 및 수많은 은인들의 희생과 도움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