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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의 눈] 믿지 못할 가면, ‘익명’ / 김지영

김지영 (이냐시오) 전 경향신문 편집인
입력일 2018-09-11 수정일 2018-09-11 발행일 2018-09-16 제 3112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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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들을 위한 미디어 리터러시 ④
앞선 칼럼을 다시 상기해보자. 취재원(행동주체)을 나타내지 않고 ‘~~으로 알려졌다’ ‘~~으로 전해졌다’는 따위의 피동형 종결어미를 쓴 기사는 일단 불량뉴스에 해당한다. 또 행동주체를 밝히지 않고 ‘~~라는 평가다’ ‘~~라는 지적이다’는 식의 명사형 종결어미를 쓴 기사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대개 추측성 기사이거나, 이해관계 및 이념에 치우친 기사이기 쉽다. 위 두 가지 외에 취재원을 밝히지 않는 보도문장 유형으로서 기자들이 매우 즐겨 쓰는 유형이 또 있으니, 바로 ‘익명’이다.

보도문장에서 흔히 접하는 익명이라면 ‘A씨’ ‘전문가’ ‘관계자’ ‘측근’ ‘당국자’ ‘소식통’ 같은 것들이다. 익명을 사용한 보도문장은 ‘관계자’와 같은 문법상 행동주체(취재원)가 드러나 있지만, 익명의 가면을 쓴 취재원이 과연 누군지 정체를 알 수 없다. 사실상 취재원을 밝히지 않은 것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중략) “센터가 생기면 더 적극적이고 체계적인 관리가 가능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교량 일부만 부서졌다면 복구에 3개월 정도 걸리겠지만 파손 부위가 광범위하거나 교각에도 영향이 있다면 최소 1년 이상 걸릴 것으로 내다보고 있습니다.

첫째 예문의 경우, 그 내용상 서울시 관계자의 정확한 신원을 숨길 이유가 없어 보이는데도 굳이 익명을 쓰고 있다. 아마도 기자가 습관적으로 익명을 썼든지, 너무나 소심한 서울시 공무원이 이름을 숨길 이유가 없는데도 굳이 익명을 요청했을 것이다. 아니면, 기자가 자신의 생각을 서울시 관계자라는 가공의 익명 인물을 통해 나타냈을 수 있다.

둘째 예문 역시 ‘전문가’의 이름을 밝혀야 한다. 구체적인 진단과 전망을 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모든 전문가들이 다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떤 사안을 막론하고 전문가의 의견은 저마다 다를 수 있으므로 막연하게 ‘전문가들’이라고 불특정 전문가들을 다 지칭해서는 안된다. 대표적인 ‘일반화의 오류’다.

요즘, 권위가 있다는 신문과 방송들도 공공연히 익명의 ‘전문가들’을 동원해 이런저런 자기 의견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는 큰 잘못이다. 한 두 전문가의 말을 듣고 ‘전문가들’이라고 일반화하거나, 아니면 매체나 기자들의 생각을 ‘전문가들’이라는 가공의 익명 취재원을 통해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매체나 기자가 익명의 취재원을 조작·동원해 자신의 이해관계와 이념, 성향을 대변하게 하는 일은 동서고금의 언론계에서 흔한 일이 돼왔다.

익명을 남용하는 기사는 저널리즘의 원칙인 정확성이나 객관성, 공정성을 정면으로 배반하기 때문에 보도윤리에서는 익명 사용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신문윤리실천요강 제5조(취재원의 명시와 보호)는 ‘보도기사는 취재원을 원칙적으로 익명이나 가명으로 표현해서는 안되며 추상적이거나 일반적인 취재원을 빙자해 보도해서는 안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다만 이 요강은 미성년자, 범죄피해자, 형이 확정되지 않은 피의자 등과 함께 보도로 인해 신변상 불이익을 당할 수 있는 이는 가능한 익명을 쓸 것을 주문하고 있다.

또 공익을 위해 반드시 보도해야 하는 사안이지만, 취재원이 익명을 요구한다면 이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내부 고발자들이 취재기자에게 익명을 요구하고 기자들이 이를 받아들이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세계 언론계의 전설이 된 워터게이트 사건 취재보도 과정이 대표적이다. 워싱턴 포스트의 두 기자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은 2년간의 끈질긴 추적 끝에 리처드 닉슨을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임기도중 물러나는 대통령으로 만들고, 수많은 관료들을 처벌받게 한다. 취재과정에서는 지속적으로 제보를 하는 취재원이 있었는데, 이 취재원은 익명을 요구하고 기자들은 그를 ‘딮 스로트(deep throat; 깊은 목구멍)’라는 익명으로 표현한다. 베일에 싸였던 딮 스로트의 정체는 30년이 지난 2005년, 미국 연방수사국(FBI) 부국장이었던 마크 펠트였음이 본인의 고백에 따라 확인됐다.

공익을 위해 보도해야만 하는 사건이었고 이를 위해 취재원을 익명으로 처리한 대표적 사례다.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김지영 (이냐시오) 전 경향신문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