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민범식 신부의 쉽게 풀어쓰는 기도 이야기] 존재의 변화

민범식 신부(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rn서울대교구 소속으로 2003년 사제품을
입력일 2018-06-11 수정일 2018-06-12 발행일 2018-06-17 제 3099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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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정체성이 자존감 키운다
참된 기도는 ‘하느님 닮은 삶’으로 변화시켜
삶의 관점 바뀌면 살아가는 모습도 달라져

찬미 예수님.

이제 마지막 두 번의 글을 남겨놓고 있습니다. 이제 끝이라는 생각을 하니 이런 저런 드릴 말씀들이 자꾸 떠오르기도 합니다만, 생각해보면 더 쉽고 분명하게 말씀드리지는 못했어도 그래도 드릴 수 있는 말씀은 다 드렸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나중심’에서 ‘너중심’으로 건너가는 파스카의 여정, 그 여정을 걷기 위해 끊임없이 요구되는 식별의 삶,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핵심 열쇠인 사랑! 이처럼 끊임없이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의 삶을 살 때 진정 우리가 행복하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사랑을 주기 위해 먼저 필요한 것이 이미 내가 사랑받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용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새로운 것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이런 사랑의 삶, 파스카의 삶을 살아갈 때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결과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로~다”로 시작하는 성가를 다들 잘 아시죠? 요한복음 15장 말씀을 바탕으로 만든 곡입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요한 15,4)라는 예수님 말씀을 들으면, 정말 그렇게 늘 예수님과 붙어서 살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죠.

그런데 사실 예수님의 말씀은 이처럼 당신과 연결돼 있으라는 것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첫 시작부터 이렇게 말씀하시죠.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나에게 붙어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요한 15,1-2) 우리가 예수님께 붙어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더 나아가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마음의 위로와 평안을 느끼고 그래서 나 혼자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참된 기도의 삶은 반드시 그 열매를 맺게 돼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열매를 우리는 ‘존재의 변화’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우리 존재가 점점 변화돼 간다는 말이죠. 실은 이 또한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음으로써 끝내는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닮아가는 것이 우리의 최종 목적이죠. 이 점을 희랍 교부들은 신화(神化, Deificatio), 곧 ‘인간이 하느님이 된다’라는 유비적인 표현으로까지 나타내고 있습니다. 결국 하느님을 닮아간다는 것은 결국 내 자신이 변화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기도를 정말 많이 하고 주일미사는 물론이거니와 평일미사에도 매일같이 참례하고 또 그 외의 다른 신심단체 활동을 많이 하고 있지만, 여전히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갈등이 계속된다거나 아니면 비슷한 잘못에 자꾸 걸려 넘어진다면, 그런 분은 자신이 기도생활을 올바로 잘 하고 있는지 의심해 봐야 합니다. 기도생활을 정말 제대로 하고 있다면, 자신의 삶이 변화되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요. 사랑은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다는 것, 이미 말씀드렸지요?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의 존재가 변화된다는 것, 삶이 변화된다는 것은 나라는 사람 자체가 달라지거나 아니면 삶의 객관적인 환경이 바뀐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내 안에 있는 약함, 나중심의 욕구들, 한계는 그대로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 다양하게 겪게 되는 어려움, 고통들도 그대로 있죠. 하지만 이러한 것들이 달라져서 내가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자기 자신 그리고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질 때, 자신이 구체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변화됩니다. 내 자신이 아무런 단점이 없는 완벽한 사람이기 때문에 나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모습 그대로도 하느님의 사랑 받는 자녀라는 것을 깨닫기 때문에 나를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자녀들이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가고 경제 형편이 좋아지고 아무런 걱정거리가 없어서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이 계속 있더라도 그 안에서 나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감사와 찬미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존재의 변화를 이룰 수 있을까요? 우리가 이룰 수 있는 변화의 한 예를 루카복음 15장에 나오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아버지 유산을 미리 받아서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다시 돌아온 작은아들과, 그런 것 하나 없이 아버지 곁에서 성실히 살아온 큰아들 이야기입니다. 윤리적으로 따지면 당연히 큰아들 모습이 더 좋게 보입니다. 반면에 작은아들의 행동은 비난 받아 마땅하지요.

하지만 한번 생각해 보세요. 작은아들이 그 모든 행동,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하고 받은 유산을 다 탕진한 후에 집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그 행동의 좋고 나쁨을 떠나서 작은아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어쨌든 자기 자신이 아버지 ‘아들’이라는 자의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아버지 아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유산을 미리 달라고 청할 수도 있었고, 방탕한 생활 후에도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와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큰아들은 어땠죠? 본인 스스로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종’처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다고 이야기합니다. 본인도 아버지의 아들이었지만, 아들이라는 정체성보다는 종이라는 정체성으로 살아왔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느님의 자녀로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종으로 살고 있습니까? 하느님을 만나는 것, 그분처럼 너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이 정말 기뻐서 더 하고 싶은 마음이 드십니까, 아니면 그렇게 살지 않으면 혹여나 벌을 받지 않을까 하는 마음 때문에 의무감으로 해나가고 계십니까?

내 자신이 정말 하느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마음으로 깊이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그 결과는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긍정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지금 내가 생긴 모습이 어떠하든 간에, 이미 지금도 충분히 하느님 사랑을 받고 있고 또 하느님 닮은 모습으로 성장해 갈 수 있다는 기대를 할 수 있게 되죠. 하지만 그러한 사실을 온전히 깨닫지 못하고 그래서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자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위해서 필요한 자존감을 다른 토대들에서 찾으려고 끊임없이 애쓰게 됩니다. 전에 말씀드렸던 ‘인정받는 것’이 중심이 되는 삶입니다.

종처럼 의무감으로 살아가던 사람이 자녀로서의 자유를 누리게 될 때, 인정받는 것에 전전긍긍하며 살아가던 사람이 사랑 받고 있음에 대한 기쁨으로 여유로워질 때, 우리는 그런 사람을 보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어, 사람이 변했네?”

기도의 열매로 일궈지는 존재의 변화입니다.

민범식 신부(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rn서울대교구 소속으로 2003년 사제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