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환경

[생태칼럼] (29) 욕망으로 가득 찬 길

박그림(아우구스티노)rn녹색연합·‘설악산국립공원 지키기 국민행동’ 공동대표
입력일 2018-06-11 수정일 2018-06-12 발행일 2018-06-17 제 3099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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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숲을 바라보면 도무지 길이라곤 없을 것 같아도 숲으로 들어서면 희미하게 길이 보이고 드문드문 생명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짐승들이 다니는 길을 따라 부드럽게 나무 사이를 지나 나지막한 언덕을 넘어선다. 갑자기 물소리가 온몸을 에워싸면서 빨려들 것 같은 초록빛 연못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잠깐 머뭇거리듯 쉬었다간 짐승들의 발자국이 초록빛 연못 가를 따라 어지럽게 찍혀있고 골짜기를 건너간 발자국은 가파른 산길을 비스듬히 올라 사라졌다.

짐승들이 다니는 길은 산의 생김새에 따라 가장 적은 힘을 들여 오르내리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길을 따라가면 힘도 덜 들고 마음까지 여유로워지는 것을 느낀다. 그렇게 다니는 길은 크게 패이거나 넓혀지지도 않았고 자연과 잘 어우러져 자연 속으로 깊이 들어가도록 이끌어 준다. 하루 종일 짐승들이 다니는 길을 따라 오르내리며 짐승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날은 몸도 마음도 가벼워진다. 그러나 우리들이 다니는 길은 짐승들이 다니는 길과는 사뭇 다르다. 정상을 향해 곧장 뻗어 오르기도 하고 절벽을 가로질러 나무데크를 매달아 길을 만들기도 한다. 그 길은 모두 정상으로 빠르게 이어지고 있을 뿐 어떤 자연스러움도 느낄 수 없는 욕망으로 가득 찬 길처럼 여겨진다.

나를 스치는 생명과 마음을 나누는 것조차 어려운 산길을 걸으면 빠르게 정상에 오르려는 마음뿐이다. 몸에 마음을 맞춰야 하는 산길에서 숨이 턱에 차고 몸이 힘들다고 아우성을 치지만 마음은 벌써 정상에 가 있는 길이다. 자연 속에서 내 힘으로 오를 수 없는 곳은 가지 않으면 된다. 누구나 그 길을 가야 하는 것도 아니고 누구나 갈 수 있도록 만들어서도 안 된다. 자연스러움이 묻어나는 길은 힘들면 돌아가고 돌다보면 바람을 맞으며 쉴 수 있는 길이다. 빠른 듯하면 더디게 만들고 느리면 끌어주면서 오르내리던 산길이 사라지고 있다. 굽이굽이 돌아 오르던 산길은 모두 곧장 뻗어 오르고 가로질러 가고 쏟아지듯 내려오는 길로 바뀌고 있다.

거기에 위험하고 불편하다는 이유로 돌계단이며 나무데크를 깔고 그 길을 오를 수밖에 없도록 만들고 있다. 결과만 따지는 잘못된 세상의 흐름을 따라 산에서도 정상에 오르는 것만이 목표가 된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산에 간다는 것은 나를 스치는 자연의 흐름에 나를 얹어 가는 길이다. 계절에 따라 피고 지는 산풀꽃의 아름다움에 넋을 빼앗기며 느끼는 자연의 경이로움과 작은 돌 위에 얹혀진 짐승 똥에 깃들인 삶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때 더불어 살아가는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게 된다. 산길에서 마주치는 나무들의 거친 껍질에 배인 오랜 세월의 무게는 우리들 삶의 가벼움을 깨닫게 하고 거친 바람 속을 비틀거리며 가파른 산길을 오를 때 스스로의 대견함은 삶을 얼마나 단단하게 잡아주는가.

우리들의 삶을 결정하는 자연 속에서 무릎 꿇고 눈높이를 맞춘다면 우주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경이로움에 흠뻑 빠질 수 있을 것이다.

굳이 정상에 오를 까닭도 없지만 불편함과 위험조차도 기꺼이 받아들이며 가야 하는 산길이다.

박그림(아우구스티노)rn녹색연합·‘설악산국립공원 지키기 국민행동’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