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행복하여라,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 한반도 평화 기원 유럽 순례 (하) 폴란드 평화 순례 여정

폴란드 서상덕 기자 sang@catiems.krrn최현경
입력일 2018-06-11 수정일 2018-06-12 발행일 2018-06-17 제 3099호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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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한다. 그러나 잊지는 않겠다”
■ 아우슈비츠
나치 독일이 폴란드 침공하며 수용소 만들어 민간인 학살
聖 콜베, 처형대상 대신 선종 아사형(餓死刑)에도 기도하며 수감자에게 위로와 용기 줘
■ 독일 총리의 사과
폴란드 주교단이 서독교회에 손 내밀고 "용서" 서한 보내
영향 받은 서독 브란트 총리 폴란드 찾아와 무릎 꿇고 눈물
"주 사랑 따르면 못할 일 없어"

인류는 지금 전대미문 한 편의 대서사시를 써내려가고 있다. 발원지는 한반도다.

반세기도 더 전, 또 한 편의 서사시를 써내려갔던 이들이 있다. 그 주인공은 폴란드였다.

폴란드와 한국. 두 나라는 지역적 거리를 뛰어넘어 닮은 점이 많은 나라다.

두 나라 모두 가까운 이웃으로 인해 역사에서 지우기 힘든 엄청난 상처를 입었다는 점에서 공유할 수 있는 점이 적지 않다.

폴란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침공으로 300만 명의 유다인을 포함해 600만 명 넘는 인명 피해를 입었다.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는 폐허가 돼 7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복구공사를 해야 할 정도다.

한국도 비슷한 시기 일본이 입힌 상처로 지금까지 아파하고 있다. 물자 수탈과 강제 징용·징병을 통해 죽음으로 내몬 것은 물론이고 여성을 위안부로 강제동원하는 등 인류 역사에 지우기 힘든 기억을 안겼다.

하지만 오늘날 두 나라는 다른 길을 걸어가고 있다.

설문조사에 따르면, 폴란드인의 75%가 독일에 호감을 갖고 있다고 한다.

한국은 어떠한가. 한국 사람들의 ‘일본에 대한 호감도’는 50%를 넘긴 적이 없다. 일본 사람도 마찬가지여서 1988년 서울올림픽 때(50.9%)와 2002년 한·일 월드컵 공동개최 때(55.0%)를 제외하면 늘 50% 아래를 밑돌았다. ‘한국인이 가장 싫어하는 나라는 일본’이라는 말은 당연한 명제로까지 받아들여진다.

이러한 차이를 낳은 것은 무엇일까. 그 배경엔 ‘과거사’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은 두 나라 사이에 버티고 있는 ‘고르디우스의 매듭’(Gordian Knot)을 언제까지 지고 갈 것인가.

폴란드는 ‘매듭을 푸는 성모님’의 지혜를 보여준다.

■ 용서, 주님 사랑 따르는 모습

“내가 대신 죽도록 해주십시오.”

일순간 모두의 눈길이 한곳으로 쏠렸다. 수번 ‘16670’을 단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가 그 자리에 서있었다.

콜베 신부가 갇혀있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는 탈주자가 생기면 연대책임을 물어 같은 막사에 있는 수용자 10명을 본보기로 처형했다.

1941년 7월 말, 콜베 신부가 있던 14동 막사에서 탈주자가 발생했다. 수용소 지휘관이자 나치 친위대 장교인 카를 프리취는 14동 수용자 가운데 10명을 무작위로 끌어내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10명 가운데 폴란드군 중사였던 프란치셰크 가요브니체크가 있었다. “이제 여기서 죽는구나. 나의 부모, 나의 아내, 나의 자식들을 다시는 볼 수가 없구나!” 가요브니체크의 울부짖음에 콜베 신부가 대신 죽겠다고 나선 것이다.

프리취는 이들을 바로 처형장으로 보내지 않았다. 콜베 신부와 다른 9명의 죄수들은 지하감옥(일명 ‘13호 감방’)에 갇혔다. 음식은 물론 물까지 끊어 굶어죽도록 가뒀다. 아사형에 처해지면, 굶주림과 갈증으로 정신착란 상태에서 죽는 것이 보통이다.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지하감옥에서도 콜베 신부는 다른 이들을 위로하며 용기를 주었다. “우리는 곧 천국에 있게 될 것입니다.”

콜베 신부가 갇힌 후 감옥 안에서는 기도와 성가 소리가 끊이지 않아 마치 성당에 온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배고픔과 탈진으로 소리는 점점 잦아들었다. 하루하루 시간이 흐를수록 차가운 시신이 돼 들려 나가는 이들이 늘었다.

3주 가까운 시간이 지났지만 콜베 신부와 다른 3명은 여전히 숨을 쉬고 있었다. 그야말로 초인적인 힘이었다. 콜베 신부가 아직 살아있다는 소문이 수용소 내에 퍼지자 나치는 병원 잡부로 일하는 죄수를 시켜 독약을 주사해 죽이도록 한다.

1941년 8월 14일, 콜베 신부는 기도하면서 스스로 팔을 뻗었다. 독주사가 들어가는 건 잠시였다. 콜베 신부는 벽에 기대앉아 눈을 뜨고 머리를 왼쪽으로 기울인 채 숨을 거뒀다. 그의 얼굴은 어둠 속에서도 온화하고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콜베 신부의 시신은 8월 15일 아우슈비츠 한켠 시신 소각장에서 불태워졌다. 그렇게 그는 희망조차 갖지 못했던 이들과 함께 주님의 품으로 돌아간 것이다.

콜베 신부의 희생은 단순히 가요브니체크 한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희망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아우슈비츠에서도 절대적인 절망과 어둠의 공간인 아사감방에서 비참하게 죽어갈 아홉 명의 영혼과 함께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그의 선택은 순간적인 충동이나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의 존재 안에 깊이 뿌리 내린 소명 의식에서 나온 것이었다.

훗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된 카롤 보이티와 추기경은 1971년 콜베 신부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그는 승리보다 더 어려운 것, 즉 죄를 묻지 않고 용서하는 사랑을 전해 주었습니다. 사랑으로 타오르는 마음으로 증오의 변증법적인 지옥 같은 굴레를 부수었습니다. 그리고 그 끔찍한 마법을 몰아냈습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더 강합니다.”

1970년 12월 7일 폴란드 바르샤바의 유다인 위령탑에서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가 무릎 꿇고 있다. 나치 수용소 생존자인 유제프 치란키에비치 폴란드 수상은 브란트 총리를 끌어안고 통곡하며 말했다. “용서한다. 그러나 잊지는 않겠다.” 출처 Ghetto Fighters’ House Museum

■ 폴란드와 독일의 화해 이끈 교회

1970년 12월 7일 오전 7시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 자멘호파 거리의 유다인 위령탑.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3년 바르샤바 게토의 유다인들이 나치 독일에 맞서 28일간 봉기했다가 5만6000여 명이 참살당한 일을 기리는 탑이다. 초겨울 비가 눈물처럼 위령탑을 적시고 있었다.

‘독일과 폴란드 상호관계 정상화의 토대를 위한 조약’(바르샤바 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온 서독 빌리 브란트 총리가 그 앞에 섰다. 위령탑 앞에서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던 브란트 총리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놀라운 장면이었다.

나치 강제수용소 생존자인 유제프 치란키에비치 폴란드 수상은 다음 행선지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브란트 총리를 끌어안고 통곡했다. 그리고 말했다. “용서한다. 그러나 잊지는 않겠다.”(Forgivable, but Unforgettable)

이후 나치 독일이 저지른 만행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은 역대 독일 총리들에게 전통이 됐다.

그 뒤 폴란드는 바르샤바에 브란트 광장을 만들어 무릎을 꿇은 브란트 총리 모습을 담은 기념비를 세웠다.

많은 이들이 독일과 폴란드가 화해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건으로 브란트 총리의 이 행동을 꼽는다.

하지만 독일과 폴란드가 화해의 손을 맞잡을 수 있었던 것은 이에 앞서 두 나라 그리스도인들이 화해의 길을 놓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1965년 ‘폴란드 가톨릭 전래 1000주년 기념식’을 준비하던 폴란드 가톨릭 주교단은 서독 주교회의에 초대 서한을 보냈다. 편지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우리는 독일을 용서함과 동시에 용서를 구한다.’

나치 독일이 저지른 만행을 용서할 테니 폴란드가 2차 대전 후 독일인을 강제 추방한 것을 용서해 달라는 것이었다.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먼저 손을 내민 셈이다.

당시 모든 폴란드인들이 주교단의 결정을 반긴 것은 아니었다. 폴란드 학교에서는 ‘폴란드 주교들이 독일에 용서를 구한 태도가 과연 옳은 것이냐’를 두고 투표가 벌어지기도 했다. 과반수의 학생들이 폴란드가 독일에 용서를 구한 행동이 잘못된 것이라고 반대의사를 피력했다.

하지만 이 일은 폴란드인들이 갖고 있던 독일에 대한 생각이 바뀌는 계기가 됐던 것이 분명하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좇자면 용서 못할 일도 없고 화해 못할 대상도 없었던 것이다.

나아가 폴란드 주교단의 이 서한은 서독 여론을 움직이는 결정적 전기가 됐다. 이러한 화해의 노력은 1969년 서독 총리에 취임한 빌리 브란트가 동구 공산권과의 관계 개선을 목표로 한 ‘동방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됐다.

오늘날 누구보다 가까운 이웃으로 두 손 맞잡고 화해로 난 길을 걸어가고 있는 폴란드와 독일의 모습은 아무리 끔찍한 기억조차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지우고 새로운 그림을 그려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한반도 평화 기원 유럽 순례단이 5월 20일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총살 형장을 둘러보고 있다. 이곳은 나치 독일이 폴란드에 지은 강제 수용소로, 유다인 등을 학살한 장소다.

5월 21일 폴란드 크라쿠프 자비의 성모 수녀원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한반도 평화 기원 유럽 순례단.

폴란드 서상덕 기자 sang@catiems.krrn최현경 명예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