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민범식 신부의 쉽게 풀어쓰는 기도이야기] 사랑 받을 용기

민범식 신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rn서울대교구 소속으로 2003년 사제품
입력일 2018-06-04 수정일 2018-06-05 발행일 2018-06-10 제 3098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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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하느님 사랑에 대한 거부
있는 그대로 자신의 모습 받아들이는 것이 곧 ‘겸손’ 
스스로 ‘하느님 사랑받는 자녀’라는 정체성 기억해야

찬미 예수님.

우리네 기도의 삶이 결국엔 사랑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너중심으로 사랑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요! 고해소에 있다 보면 참 많은 상처와 미움 그리고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듣게 됩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안에도 누군가를 향한 미움과 화가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분명하게 드러나는 나중심의 모습이라면 차라리 다루기 쉽습니다. 더 어려운 것은 우리 삶 안에 교묘하게 숨어 있는 나중심의 모습입니다. 정말 다른 사람을 위해서 또 하느님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행동한 것이 결국에는 나 자신을 위한 일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또 내가 그렇게 움직였구나’ 하는 자책감에 괴로워하게 되죠. 더 사랑하며 살고 싶음에도 그러지 못하는 무능함 때문에 다시 한 번 울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바로 자신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제가 그리 오랜 시간을 살아온 것도 아니고 또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을 만난 것도 아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크게 느끼게 되는 것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이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열쇠 중 하나라는 점입니다. 하지만 그 중요한 만큼, 정말로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자기 자신을 사랑하십니까? 만일 그렇다고 생각하신다면, 이번에는 자신의 모습 중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을 생각해 보세요. 뭐가 돼도 좋습니다. 겉모습부터 시작해서 성격의 어떤 부분이든 아니면 전에 말씀드렸던 나중심의 욕구들, 내 안에 자리 잡은 죄로 기울어지는 성향들이요. 이런 부분을 생각하고 난 후에도 자신이 마음에 드십니까? 자기 자신을 사랑하십니까?

많은 분들의 경우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죠. 저 역시도 그렇지만, 정말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지금까지 그런 사람을 만난 적이 거의 없다 싶지요.

여기에서부터 우리 삶의 어려움이 시작됩니다. 결국에는 나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스스로 확신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좋은 사람이고, 사랑 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것, 다른 이에게 받아들여지고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스스로 믿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단점이 없어서, 못하는 것이 없어서, 성격이나 능력이나 가진 것 등 모든 면에 있어서 완벽해서가 아닙니다. 그 반대로 약함도 한계도, 죄성도 추악함도 다 있지만 그래도 그 모습 그대로, 지금의 나라는 사람이 충분히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내가 싫은 거죠.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하죠? 당연히 그 모습을 감추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싫을뿐더러 나 스스로도 보고 싶지 않아서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자꾸만 그 모습을 감추거나 다른 걸로 가리려고 하게 됩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방어기제입니다. 그래서 다른 것을 통해 자기 자신을 더 부풀려 과장되게 표현하거나, 자신이 아닌 외부로 그 탓을 돌리거나, 아니면 현실을 왜곡된 방식으로 이해하거나 아예 부정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약하고 무능한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죠. 요즈음 많이 이야기되는 ‘낮은 자존감’과 연관돼 있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채우기 위해서, 전에 말씀드렸던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중심이 돼 살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도리어 이 인정받고 싶은 욕구 때문에, 그 욕구를 채우려는 행동 때문이든 아니면 욕구가 채워지지 않아서든, 계속되는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사랑이 ‘나르시시즘’에서 보이는 자기 기만적인 사랑, 즉 나의 약함을 가리기 위해서 과장되게 부풀려 하는 사랑은 아닙니다. 전적인 나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이기적인 사랑도 아닙니다.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는 것은, 다시 말씀드리지만, 지금의 내 모습 그대로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튼튼한 것이든 약한 것이든, 성숙한 것이든 미성숙한 것이든, 아름다운 것이든 추악한 것이든, 이 모든 것을 지닌 전체로서의 나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실은 이것이 영성에서 이야기하는 ‘겸손’의 참된 의미입니다만, 여기에서 더 말씀드리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처럼 지금의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 그렇게 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잘 와닿지 않으시죠? 당연히 그러실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그렇지 못한 환경에서 자라왔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내가 어떤 모양새여도 괜찮다는, 지금 있는 자체만으로도 사랑받을 수 있고 또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많이 체험하지 못하고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들의 경우, 어린 시절부터 그랬지요. 그래서 상처가 생기고 우리 안에 나중심의 욕구들이 더 크게 자리 잡아온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부모님들의 탓만은 아닙니다. 그분들도 그렇게 상처 속에서 자라오고 살아오셨다는 것, 전에 말씀드렸던 원죄와 관련된 내용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내 자신에게서는 그 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해도 내 성에 차지 않는 모습이 계속 보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는 하느님께로부터 그 답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어진 존재, 이미 하느님께 사랑 받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자신에게서가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그 근거를 찾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가장 근원적인 답, 우리 정체성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정체성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나중심적인 모습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아니, 우리가 보일 수 있는 가장 나중심의 모습이 바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 다르게 말하면 거부하는 것입니다. 현대 신학에서 말하는 ‘지옥’ 개념과도 연결돼 있는 내용이죠. 지옥의 반대말이 구원이라고 한다면, 그 구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제 자신을 포함해서, 독자 여러분께 꼭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자기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해주세요. 그리고 하느님께, 또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해달라고 요구하세요. 몇 해 전 유행했던 ‘미움 받을 용기’라는 책도 있습니다만, 먼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 받을 용기’입니다. 이렇게 사랑을 받고 또 사랑 받는 내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 그럴 때 우리에게 너중심으로 사랑할 수 있는 힘이 더 생기게 됩니다. 바로, 우리 구원의 시작입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1요한 3,1)

민범식 신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rn서울대교구 소속으로 2003년 사제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