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행복하여라,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 한반도 평화 기원 유럽 순례(상) 순례 취지와 주요 순례지 소개

독일·폴란드 서상덕 기자
입력일 2018-05-29 수정일 2018-05-29 발행일 2018-06-03 제 3097호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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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길’ 열어간 유럽교회 발자취 따르다
사회주의체제 벗어나 평화 시대 맞이한 나라 방문
보이지 않는 곳에서 노력한 그리스도인 모습 탐구
한반도에 적용 가능한 방안과 실천적 노력들 모색

5월 15일 평화 순례 첫날, 통일 전 독일 베를린을 동서로 가르던 장벽 일부에 조성된 1.3㎞ 길이의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East Side Gallery) 앞에서 기념촬영하고 있는 순례단. 1990년 세계 21개국의 작가 118명이 베를린 장벽 동쪽에 그린 105개 그림들은 더 나은 세상을 향한 희망과 평화의 열망을 표현하고 있다. 뒷배경은 소련 서기장 브레즈네프와 호네커 동독 서기장이 키스하는 모습을 담은 ‘형제의 키스’. 공산주의 몰락을 풍자하고 있다.

4·27 남북 정상회담, 이어지는 북미 정상회담 등 그 어느 때보다 한반도에 평화의 물결이 넘실대고 있다.

한반도에 새로운 평화의 기운이 싹트기까지에는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노력해온 그리스도인들의 모색과 노력이 있었다.

특히 한국교회는 남북 관계가 분수령을 맞을 때마다 앞장서 대화의 물꼬를 트며 평화의 길을 개척해왔다.

이러한 모색의 일환으로 가톨릭신문은 특별기획 ‘한반도 평화 기원 유럽 순례’(이하 평화 순례)를 마련한다.

평화 순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세상의 평화를 위해 주님의 길을 넓히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발자취와 숨결을 확인하는 길이다.

이번 기획은 ‘평화의 시대’에 맞갖은 그리스도인의 자세와 일상에서 평화를 위해 함께할 수 있는 실천적 노력들은 어떤 것이 있는지 생각해볼 수 있는 장이 될 것이다.

우리보다 앞서 평화의 길을 열어 걸어가고 있는 유럽교회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통해 한반도에 필요한 평화의 길을 모색하는 새로운 단초를 마련할 수 있길 바란다.

이를 통해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일상 속에서 추구해야 할 평화의 의미와 올바른 가치관을 공유하고자 한다.

‘사회주의 속에서 본질적으로 사회주의와 일치하지 않는 유일한 조직.’

독일 통일 이전인 1980년대 동독 정부가 ‘교회’를 일컬어 한 말이다.

당시 교회와 정치·권력 간의 불화를 보여주는 말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세속이 범할 수 없는 교회의 위상을 드러낸 말이기도 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을 앞둔 자리에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요한 18,36)고 분명하게 밝힌다.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의 공동체인 교회는 세상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이러한 교회의 위상은 세상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확연히 드러난다.

일찍이 분단과 압제 역사를 극복해온 유럽, 유럽교회의 경험 속에 70년 넘게 한반도가 마주하고 있는 분단 현실을 투영해본다.

이를 통해 한반도에 간절한 평화의 노둣돌을 놓는 일에 힘을 보태고자 한다..

폴란드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 갇혀 지내다, 탈옥한 수감자 대신 자원해 순교했던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의 수용감방.

■ 구 동구권 순례에 나선 배경

동구는 지리적 개념이 아니라 정치적인 개념이다. 시장경제체제를 기반으로 하는 서구 또는 서방세계에 대응하는 사회주의경제체제를 중심으로 하는 나라들을 말한다.

구 소련과 소련의 영향권 안에 있던 동독을 비롯한 폴란드,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알바니아 등…. 이 나라들은 제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소련에 점령돼 사회주의를 강제이식 당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구 동구권 국가들이 지금도 앓고 있는 아픔의 뿌리다.

동구권 나라들이 아픔을 딛고 평화의 길을 찾아가는 데는 종교의 힘이 적지 않았다. 그 가운데 동독과 폴란드는 국민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앞장서 평화를 향한 다리를 놓아왔다는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

끊임없이 평화의 길을 다져오고 있는 독일과 폴란드, 그리고 두 나라 교회 모습 가운데서 한반도에 새로운 평화의 물결을 일으킬 지혜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아우슈비츠의 현재 모습. 나치 독일이 유다인 학살을 위해 지은 폴란드 영토 내 강제 수용소였다.

■순례지 개요

-동독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이 패망한 후, 전승국들이 얄타회담에서 전후 처리를 논의하면서 독일 지역 분할 점령을 합의한 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동·서독으로 분할된 초기만 하더라도 두 지역 간 왕래가 완전히 단절된 것은 아니었다. 급격한 스탈린식 사회주의체제 도입에 반발한 동독지역 주민들이 서독지역으로 이주하거나 망명하면서 동·서독 간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했다. 결국 1961년 동독 서기장 발터 울브리히트 지시로 동·서독 국경에 철책선을, 서베를린 주위에 베를린 장벽을 쌓았다. 1950년부터 1961년 사이 서독으로 영구 이주한 동독 주민만 345만 명에 이른다.

그러나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계속 억누를 수 없었다. 불과 3년 후인 1964년 동독 공산당은 체제 붕괴 위협에 물꼬를 터주기 위해 매년 연금생활자 100만 명에게 10동독마르크(M)를 줘 4주간 서독을 방문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서독은 즉시 동독 화폐보다 4~10배 가치 있는 서독화폐(DM) 100마르크(약 50달러)씩을 환영금으로 주며 맞았다. 이 관행은 동·서독이 통일될 때까지 지켜졌다. 1972년부터는 은퇴한 연금생활자가 아니더라도 당국 허가를 받으면 언제든 서독을 방문할 수 있었다. 이산가족상봉 행사를 통해 지금까지 1000명도 안 되는 사람들이 만난 한반도 현실과 대비된다.

이 시기 동·서독 주민들은 자유롭게 편지와 전화를 주고받았다. 동·서독 사이에 오간 편지와 전화는 각각 연간 1억 통에 달했다.

동독 주민들의 서독 여행은 1985년부터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동독 정부가 ‘인질’을 남기는 조건으로 여행 조건을 상당히 완화했기 때문이다. 1985년 6만6000명에서 1986년에는 57만3000명으로 10배 가까이 늘어났다. 1987년에는 120만 명, 1988년에는 220만 명으로 폭증했다. 또한, 연금생활자의 서독 나들이는 1985년 160만 명에서 1987년 380만 명으로 두 배 이상 늘었다. 1989년에는 동·서독 합해서 무려 1000만 명이 동·서독을 오갔다. 사실상 1986년, 독일은 이미 통일됐던 것이다.

-폴란드

폴란드는 966년 피아스트(Piast) 왕조의 미에슈코 1세(Mieszko I, 재위 963~992)가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여 나라를 세웠다. 그 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 왕조인 야기에오(Jagiello) 왕조를 거쳐 16세기 말 유럽 곡창 지대를 배경으로 전성기를 누렸다. 1772년, 1793년, 1795년 세 차례에 걸친 러시아·오스트리아·프로이센 삼국에 의한 영토 분할 끝에 1795년 국가가 소멸되고 만다.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연합국에 의해 1918년 독립국가로 재수립돼 1939년까지 독립을 유지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서부 지역은 나치 독일에, 동부 지역은 소련에 분할 점령 통치를 받았다. 나치 독일은 폴란드 영토 내에 ‘죽음의 수용소’를 만들어 잔학한 학살을 자행했다.

1944년 8월 1일 독일로부터 바르샤바를 해방시키기 위해 폴란드 국내 저항군이 바르샤바 봉기(Powstanie Warszawskie)를 일으킨다.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가운데 독일군은 63일 동안 잔혹한 진압 작전을 펼쳤다. 이 봉기로 폴란드 시민 24만 명이 죽고, 63만 명이 아우슈비츠(오시비엥침) 등의 수용소로 보내져 학살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바르샤바는 완전히 파괴됐다. 1939년 바르샤바 방어전, 1943년 바르샤바 게토 봉기, 1944년 바르샤바 봉기 등을 거치며 나치 독일의 철저하고 무자비한 파괴로 도시의 85%가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폴란드 전체로 보면, 600만 명 이상의 인명 피해와 국민 재산의 38%에 해당하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종전 후 공산당 정부가 수립돼 정권을 유지해오다 1980년 자유노조 운동이 일어나 1989년 민주정부 체제가 수립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독일·폴란드 서상덕 기자 sang@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