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축성 120주년 명동대성당 발자취

최용택 기자
입력일 2018-05-21 수정일 2022-03-17 발행일 2018-05-27 제 3096호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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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에게 위안 준 한국교회 상징이자 민주화 구심점
축성 초기, 순교자 시복시성운동으로 신앙 복돋워
6·25 피란민 구제활동… 독재권력 맞선 이들 도와
현재는 열린 문화사목 중심지로 세상과 소통 노력

한국교회의 대표적 상징이자 한국 근현대사의 중심에 섰던 서울 주교좌명동대성당이 오는 5월 29일 축성 120주년을 맞는다. 신앙 자유의 상징으로, 독재에 맞선 민주화운동의 보루로 120년을 살아온 명동대성당. 현재는 지난 2014년 명동성당 종합계획 1단계 공사가 마무리된 후 시민들에게 활짝 열린 문화공간으로 역할을 하고 있다. 본지는 명동대성당 축성 120주년을 맞아 한국 근현대사에서 복음화라는 교회의 사명에 헌신해 온 명동대성당의 발자취를 시대별로 조망해 본다.

지난 120년 동안 한국교회의 상징, 민주화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서울 주교좌명동대성당. 현재 명동대성당은 사람들이 편하게 찾아와 몸과 마음을 쉬는 가톨릭 문화 사목의 전초기지로 변모하고 있다.

■ 개항기 신앙 자유의 상징

명동대성당은 모진 박해를 극복하고 신앙의 자유를 얻은 한국교회의 상징이다. 명동대성당은 순교자 김범우(토마스)가 살던 집터에 세워졌다.

명동대성당 건립은 1892년에 시작됐다. 당시 성당건립계획이 알려지자 조선 조정은 명동이 궁궐을 비롯해 서울을 빤히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라는 이유로 반대가 심했다. 하지만 당시 조선대목구장 백 요한(Jean M. Blanc) 주교의 외교적인 수완으로 건립허가를 얻었다.

백 요한 주교의 뒤를 이은 민 아우구스티노(August Mutel) 대주교는 1892년 8월 5일 명동대성당 착공식을 열고 한국교회를 위해 일했던 주교와 선교사, 은인들의 명단을 머릿돌 밑에 묻은 뒤 머릿돌을 축성했다. 성당 설계와 공사 감독은 꼬스트(Eugene Coste) 신부가 맡아 진행했다. 1896년 2월 꼬스트 신부가 선종함에 따라 프와넬(Victor Louis Poisnel) 신부가 업무를 이어받아 성당 건축을 마무리했다.

명동대성당은 1898년 5월 29일 성령 강림 대축일에 축성됐고,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봉헌됐다. 축성식에는 교회를 박해하던 조선 정부의 고관과 외국 사신들을 비롯해 전국에서 수만 명의 교우가 참석했다. 박해를 딛고 신앙의 자유를 얻어낸 한국교회 ‘승리의 상징’, 명동대성당의 본격적인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1898년 5월 29일 주교좌명동대성당 축성식에서 참석자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 시복시성운동의 중심지

명동대성당이 완공된 후 첫 사업으로 실시한 것은 바로 ‘순교자 시복시성운동’이었다. 당시 명동본당 주임 프와넬 신부는 1899년 왜고개에서 발굴돼 용산신학교에 안치돼 있던 장 시메온(Simeon Berneux) 주교 등 7명의 순교자와 1882년 내포 서짓골에서 발굴돼 일본으로 보내졌던 안 안토니오(Anthony Daveluy) 주교 등 4명의 유해를 성당지하 묘지로 안치했다.

이후 1925년 기해·병오박해 79위 순교자가 시복되자 명동대성당은 복자 유해 거동 행사를 열고 복자 제대와 복자 성화를 장식했다. 1940년 명동대성당은 ‘조선 천주교 순교자현양위원회’를 결성했고, 해방 이듬해인 1946년 9월 16일에는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 기념 미사와 성체 거동 행사를 거행하기도 했다.

■ 민족의 수난과 함께 한 명동대성당

일제강점기, 한국교회의 대표적 성당인 명동대성당은 언제나 일제의 감시와 규제 아래 있었다. 1940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제의 교회탄압은 노골화됐다. 일제의 전시총동원정책이 추진되면서 한국 천주교회는 전시총동원 체제로 개편됐다. 거의 모든 성당에서 일제의 강요 사항들이 실현됐는데, 명동대성당에서는 일본군 상급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일제의 전시총동원정책들이 시행됐다.

1945년 일제의 패망과 함께 찾아온 해방 이후, 명동대성당은 지식인층의 입교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46년에 처음 시작된 ‘가톨릭교리강좌’가 대표적인 사례였다. 이러한 노력은 당시 대한 감리교 총이사였던 정춘수와 육당 최남선 등 당대 최고 지성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결과를 얻어냈다.

해방 뒤 이어진 6ㆍ25전쟁은 명동대성당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6ㆍ25전쟁 동안 명동대성당은 교황사절 번 주교를 비롯해 유영근 신부, 정남규(요한), 김한수(노렌조) 등 많은 이들의 순교를 지켜봐야 했다. 또한 전쟁 직후 피란민에 대한 구제활동은 성당 복구와 함께 명동대성당의 중요한 과제였다. 본지 1951년 4월 15일자 1면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전쟁의 피해를 입은 명동대성당 전경과 마리아상 사진을 싣기도 했다.

명동대성당은 이후 상실감과 좌절감으로 상처 받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평화, 구원을 주는 장소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1950년대 이후 보다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한 명동대성당의 사회적 위상과 발전은 명동대성당이 역사의 한복판에 서서 민족이 겪는 수난과 고통에 적극 동참하고 그러한 수난과 고통으로부터 민중을 해방하기 위해 투신한 결과였다.

■ 민주화운동의 성지

명동대성당은 1970년대 이후 시대의 요구와 아픔, 민중의 눈물을 품어 안으며 이 나라 민주화의 성지로 자리매김했다. 1970년대 유신시기(1972∼1979년)에 명동대성당이 중심이 돼 교회와 국가 간에 첨예한 갈등을 일으켰던 많은 사건들은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인권운동에 중요한 촉매 역할을 했다.

1970년 대전에서 창립된 한국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의 활동이 점차 명동을 중심으로 전개됐으며 1975년부터 부정부패와 사회 부조리 척결, 정치에 의한 인권유린 고발 등에 앞장서면서 2월 6일 명동대성당에서 전국적인 인권 회복기도회가 열렸다. 이듬해인 1976년 ‘3·1 명동사건’ 즉 ‘민주구국 선언문 사건’으로 가톨릭과 개신교 성직자, 고(故) 김대중(토마스 모어) 대통령 등 수많은 인사들이 구속됐고 이때부터 명동대성당은 민주항쟁의 구심점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1974년에 발족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활동, 평신도운동, 노동자·농민 운동 또한 대부분 명동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1974년 지학순 주교의 양심선언 사건, 1977년 함평 농민회 사건, 1978년 동일방직 사건, 1979년 안동 농민회 사건 등이 줄을 이었다. 이어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과 이후 박종철군 고문치사 폭로 사건, ‘6·10집회’ 등 1980년대 내내 계속되는 민주화 운동의 산실이 됐다.

더구나 1990년대에도 각종 집회가 명동대성당에서 이어졌다. ‘5ㆍ18 진상규명 촉구집회’는 170일 동안 계속돼 명동대성당 최장기 농성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오는 동안 명동대성당은 교회 안에서는 한국교회의 중심으로, 한국 사회 안에서는 가톨릭교회의 상징이 돼 왔다.

고 박종철군 추모행사가 열린 1987년 2월 7일 서울 주교좌명동대성당 앞에서 시위대와 경찰이 대치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 가톨릭 문화사목의 전초기지

교회와 세상을 잇는 접점이 된 명동대성당은 문화의 광장이라는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명동대성당은 2002년 문화관 개보수 공사를 마치고 첨단 시설의 공연장 꼬스트홀을 탄생시켰다. 꼬스트홀은 다양한 음악회를 비롯한 각종 공연으로 명동을 찾는 이들에게 가톨릭 문화의 향기를 전하고 있다.

명동대성당은 지난 2012년 1898년 축성된 명동대성당을 보존하고 신자와 시민들에게 열린 공간을 제공, 세상과의 소통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는 취지로 명동성당 종합계획 1단계 공사를 시작했다. 2014년 마무리된 명동성당 종합계획 1단계 공사로 명동대성당 진입부에는 광장이 조성됐고, 명동대성당 초창기 시절의 경사로가 복원됐다. 지하 1898광장에는 서점과 다양한 카페, 식당들이 들어서 명동을 찾는 이들을 반기고 있다. 1898광장 내 갤러리 1898은 교회 안팎의 예술가들에게 회화와 조각, 서예 등 다양한 장르의 성미술품과 작품을 일반인들에게 선보이는 역할을 하고 있다.

주교좌명동본당 주임 고찬근 신부는 “그동안 명동대성당은 한국교회의 상징, 민주화의 구심점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었다”면서 “시대가 변한 지금은 과연 ‘여전히 명동대성당에 사람들이 찾아올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이어 고 신부는 “명동대성당 축성 120주년은 과거를 바라보며 미래를 준비하는 시간이 돼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최용택 기자 johncho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