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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성월 특집] ‘천주동산’ 가꾸는 마산교구 원로사목자 이한기 신부

박경희 기자
입력일 2018-05-21 수정일 2018-05-23 발행일 2018-05-27 제 3096호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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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미꽃, 성모님께 바칠 거에요”
2016년 은퇴 후 다랑이밭 가꿔
본당 제대·레지오 회합 때
필요한 꽃 나누기 위해 농사

‘성모님의 꽃밭’이라 이름 붙여봤다. 장미, 백합, 제비꽃, 라벤더…. 아름다운 꽃들로 가득 찬 꽃동산을 그렸다. 5월 17일, 경남 창원 ‘천주산’ 중턱에 자리 잡은 ‘천주동산’을 찾아가며 말이다. 산 정상엔 비구름이 앉았다. 빗길을 달려 ‘천주동산’ 팻말을 찾았다. 그런데…, 상상했던 백화만발한 꽃동산은 어디에….

“어서오세요. 반갑습니다.” 모자에 긴 장화를 신은 이가 웃으며 맞았다. 천주동산의 농장주 마산교구 원로사목자 이한기(요셉·69) 신부다.

“신부님, 꽃들은 어디에 있나요…” 인사를 나누며 꽃밭부터 찾았다.

맨 위쪽 다랑이밭으로 향했다. 비를 머금은 장미꽃, 붉은 양귀비꽃이 반겼다. 굵은 꽃송이 아래 야생화도 수줍은 듯 얼굴을 내밀었다. 다랑이밭을 따라 내려갔다. 곳곳에 이름 모를 들꽃 길이 이어졌다. 소박한 꽃밭이었다. 성모님을 닮은.

경남 창원 천주산 중턱에 자리 잡은 ‘천주동산’. 2016년 사목 일선에서 물러나 이곳에서 꽃을 가꾸고 있는 마산교구 이한기 신부가 환하게 웃고 있다.

■ 본당 제단에 바칠 꽃을

천주동산은 이한기 신부가 2016년 1월 사목일선에서 물러나 꽃농사를 지으며 지내는 곳이다. 왜 꽃일까.

“은퇴하면서 농사를 짓고 싶었어요. 무엇을 재배할까 생각하다가 제대꽃꽂이와 레지오마리애 회합 때 꽃들이 필요한데, 예산이 부족해 신자들이 사비를 들이는 것을 보았어요. 이왕 농사를 짓는 거 꽃을 재배해 본당에 봉헌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죠.”

돌을 주워내고 땅을 고르는 데만 1년이 걸렸다. 중장비 면허증을 따고, 꽃에 대한 공부도 했다.

지난해 봄, 처음으로 꽃 묘목을 심고 꽃씨를 뿌렸다. 처음엔 장미, 백합, 거베라만 재배하려고 계획했다. 어느 날, 뿌리지도 않은 꽃들이 여기저기 활짝 핀 것을 보면서 자연의 섭리를 느꼈다.

“꽃씨가 날아와 꽃이 피기도 합니다. 지난해 백합 모종을 심은 것보다 계곡을 따라 핀 야생 백합이 어찌나 아름답고 향기가 그윽하던지. 하느님께서 뿌리신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보았습니다.”

이 신부가 재배한 꽃들은 가까운 본당 신자들이 꺾어가기도 한다. 내년에는 더 많은 꽃을 나누려 부지런히 모종을 심고 씨를 뿌린다.

꽃을 가꾸고 있는 이 신부. 일하다 힘에 부치면 쉴 수 있도록 밭 곳곳에 호미와 간이 방석이 놓여 있다.

천주동산 전경. 비닐하우스 옆으로 이 신부의 숙소가 보인다.

■ 성모님께 아름다운 장미 화관을

이 신부가 꽃 재배를 마음먹은 데는 성모님과 약속도 있었다. 부제품을 앞두고 힘든 시기를 보내던 중 예전 본당 수녀님을 만나러 청주교구 감곡성당을 찾았다. 그곳 성모상 앞에서 간절히 기도했다. “사제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면 매년 성모님께 장미 화관을 씌워드리겠습니다.”

본당 성모의 밤 행사 때마다 성모님께 화관을 씌워드리며 약속을 지켰다. 사제로서 39년. 성모님의 보호가 없었다면 어떻게 사목자의 길을 걸었을까. 성모님께 늘 감사했다. 성모님과 함께 늘 행복했다.

이 신부의 방에는 특별한 성모상이 있다. 6년간 에콰도르 사목을 하고 떠나올 때 신자들이 선물한 ‘로하스의 성모상’이다. 성모상 옆엔 직접 키운 장미꽃이 한 아름 꽂혀 있다. 올 성모성월에도 그 약속은 이어졌다. 그리고 성모님께 봉헌하기 위한 꽃 재배까지. 초보 농사꾼으로 일이 힘에 부치기도 하지만 하루하루가 기쁘다.

“하루의 변화는 잘 느낄 수 없지만 한 주, 한 달이 지나 어느 날 문득 보면 새순이 돋고, 꽃망울이 맺히고, 그러다 활짝 피어나는 꽃들을 보면서 놀라기도 합니다. 생명의 신비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죠.”

들풀도 귀하게 여기며 돌보는 이 신부. ‘천주동산’에 성모님의 꽃들로 향기 그윽한 날을 꿈꾸며 오늘도 부지런히 밭을 가꾼다. 주님 제단에, 성모님 앞에 놓여질 꽃들을 피우기 위해.

천주동산 곳곳에 핀 꽃들과 에콰도르 신자들에게 선물 받은 성모상(가운데).

박경희 기자 july@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