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민범식 신부의 쉽게 풀어쓰는 기도이야기]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민범식 신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입력일 2018-05-21 수정일 2018-05-21 발행일 2018-05-27 제 3096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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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식별 통해 너중심의 삶으로 나아가야”
너중심 방향에 교묘히 숨어있는 나중심의 욕구
끊임 없는 성찰 통해 하느님 뜻에 맞게 분별해야
찬미 예수님.

이 지면을 통해 독자 여러분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이제 다섯 번 남았습니다. 연재를 해나가면서, 이제는 지금의 제가 나눌 수 있는 것을 거의 다 나눴다는 생각에 신문사 측에 말씀을 드렸고 6월 말로 연재를 끝내기로 정했습니다. 그래서 남은 몇 번에 걸쳐 그동안의 여정을 정리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돌아보면 짧지 않은 여정을 걸어왔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기도가 하느님과의 만남이요 대화라는 것에서부터, 그 만남 안에서 무슨 대화를 나눠야 하는지 또 하느님을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말씀드렸지요. 이러한 기도가 우리 일상 안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우리의 삶 전체가 기도라는 것, 그렇기 때문에 영성생활이 뭔가 세상과는 동떨어진 거룩한 생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체적인 하루 안에서 이뤄진다는 말씀도 드렸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끊임없이 내게 은총을 주고 계시기 때문에, 그 하느님을 알아듣고 이미 주어져 있는 은총을 깨달으며 살아가는 것이 영성생활인 것이죠. 그런데 우리 자신은 근본적으로 나중심으로 움직이려고 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지금 나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알아차리는 것이 어렵고 그래서 자꾸만 죄에 걸려 넘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나를 나중심으로 이끌어가려는 욕구를 성찰하고 이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을 통해서 하느님 중심, 너중심을 향해 가는 것, 이것이 바로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모습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뒤따라 하느님 중심으로 가려는 이유는,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가 진정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가치를 채움으로써 얻어지는 행복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길 원하시는 참 행복입니다.

이러한 영적 여정에 대해 말씀드리면서, 나 자신을 향하고 있는 하느님 사랑을 여러 번 강조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이미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이기 때문에 더 이상 인정받는 것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고요. 하느님의 사랑을 충분히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그러기가 쉽지 않죠. 전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하느님과의 만남은 감각 경험이 아닌 영적 경험의 차원에서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우리 감각으로 쉽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상징을 통해서 또 사건에 대한 성찰을 통해서 알아들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은총을 알아차리는 것은 늘 뒤늦을 수밖에 없다는 말씀이었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영적 삶은 마냥 좋고 편안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치열한 여정에 더 가깝습니다. 일상 안에 계신 하느님과 그분의 은총을 알아차리기 위해서 늘 깨어 있어야 하고 자기 욕구를 성찰해야 하고 또 하느님께서 어디에 계신지를 식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전통은 우리 영성생활의 이러한 점을 ‘영적 투쟁’이라는 말로 표현해 왔습니다. 마치도 날카로운 칼 위를 걸어가면서,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균형을 잡고 깨어있어야 하는 모습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결국, 식별의 문제입니다. 우리 신앙인의 생활은 계속되는 식별의 삶이고, 그렇기 때문에 교회 역사의 초기부터 ‘영적 식별’과 관련한 풍부한 가르침을 찾을 수 있는 것이죠. 무엇을 어떻게 식별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여기에서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 ‘영들의 식별’에 대해 가르치시는 이냐시오 성인을 필두로 해서, 특별히 수도회 전통의 가르침들 안에서 많은 것을 직·간접으로 배우실 수 있을 테니까요.

다만 우리의 관점에 비춰서 식별의 내용을 말씀드린다면, 우리가 식별해야 하는 것은 결국 지금 내가 하는 선택이나 행동이 ‘나중심’인가 ‘너중심’인가 하는 점입니다. 나 자신을 위한 욕구를 따르는 방향인가, 아니면 다른 이를 위하고 하느님을 위하는 방향인가를 늘 식별해야 한다는 것이죠.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식별을 할 때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입니다. 실제로는 나를 위한 선택인데, 나 스스로도 너중심의 선택이라고 속아 넘어가는 부분입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원래는 “신은 디테일에 있다”라는, 루드비히 반 데어 로에(1886~1969)라는 독일 건축가가 한 말입니다만, 요즘 여러 곳에서 이렇게 바꿔 쓰고 있죠. 이 말에 대한 해석을 여러 가지로 할 수 있겠지만, 이렇게도 알아들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정말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신앙인으로서 하느님께서 원하지 않으실 일이라고 분명하게 느끼는 것에 대해서는 사실 식별하기가 쉽습니다.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선한 일인지 악한 일인지를 쉽게 알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나쁜 행동을 안 하는 것이 크게 어렵지 않은 것입니다. 실제로 이냐시오 성인이 가르치는 참된 영적 식별의 대상은 ‘우리 자유에 맡겨져 있고 금지되지 않은 것’(「영신수련」 23항 참조)입니다. 우리에게 허락돼 있는 것들 중에 더 나은 선을 찾는 것이 식별의 목적이라는 의미지요.

이처럼 너중심이 아니라 전적으로 나중심으로 움직이는 모습이라면, 당연히 우리는 그것을 선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너중심의 방향 안에 나중심의 욕구가 은근슬쩍 끼어들어 있다는 겁니다. 누군가를 위해 베푸는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과시하려는 행동일 수 있죠. 상대방을 걱정해서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상대방의 못마땅한 모습을 단죄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바로 악마의 전략입니다. 자신을 대놓고 드러내지 않고 이처럼 교묘하게 숨어서 움직이기 때문에, 더더욱 우리는 식별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식별의 문제는 우리 영성생활을 가늠하는 굉장히 중요한 요소입니다. 우리가 식별하지 않는다면, 식별을 위해 자기 자신을 성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나중심을 향해 치달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원죄 이후의 우리의 모습, 바오로 사도가 말씀하시는 ‘비참한 인간’인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망하거나 두려워하지는 마세요.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고 있고 그분께서 주시는 은총을 얻어 누리고 있죠. 그 은총에 힘입어 나중심이 아닌 너중심의 방향으로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이고,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을 통해서 우리를 구해주셨기’(로마 7,25 참조) 때문입니다.

우리 기도의 삶, 결국 식별의 삶입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 12,2)

민범식 신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