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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본군 성노예였다」

권세희 기자
입력일 2018-05-15 수정일 2018-05-16 발행일 2018-05-20 제 3095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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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루프-오헤른 지음/최재인 옮김/308쪽/1만7000원/삼천리
50년 침묵 깬 외침 “우리는 전쟁범죄 피해자입니다”
네덜란드인 일본군 위안부 고통의 기억 혼자서 짊어지다
한국인 피해자 증언에 용기내 인류보편 인권문제 해결 촉구
1992년부터 시작한 ‘수요집회’는 세계에서 가장 오랜 시간 이어지고 있는 정기 집회다. 공식 명칭은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다. 추운 겨울이나 무더운 여름에도 피해자들과 시민들은 거리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촉구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 생존해 있는 위안부 피해자는 28명이다. 대부분은 고령이지만, 꽃다운 나이에 겪었던 큰 상처와 아픔은 아직도 보듬어지지 못하고 있다.

“1992년 정초부터 반년 내내 나는 텔레비전에서 방송되는 한국의 일본군 ‘위안부’의 모습을 보았다. 한없이 눈물만 흘렸다. 그들이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일 때마다 나는 아픈 가슴으로 그저 바라만 보았다. 그들에게 팔을 뻗어 포옹하고 싶었다.”

당시 위안부 피해자의 80%가량은 조선인이었다. 이외 20%는 다른 나라 국적을 가진 여성들이었다. 한국의 위안부 피해자들과 포옹하고 싶었다고 말하는 그는 네덜란드 출신의 피해자 얀 루프-오헤른(Jan Ruff-O’Herne)씨다.

1923년 네덜란드 식민지이던 인도네시아 자바에서 태어난 그는 신앙이 돈독한 집안에서 성장하며 가톨릭 사범대학에 다녔다. 그러나 1942년 아시아태평양 전쟁이 일어나 네덜란드가 패배한 후 끔찍한 고통은 시작됐다. 자바섬을 점령한 일본군에 의해 암바라와 포로수용소에 감금됐고 스마랑에 설치된 일본군 위안소 ‘칠해정’(七海亭)에서 강간과 폭행을 지속적으로 당했다. 가슴 아프고 두려운 기억들을 딸들에게도 차마 말하지 못하고 살았다.

지난 기억을 더듬으며 침묵을 깨고 나선 이유는 1991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였던 고(故) 김학순씨의 증언을 통해서다.

저자는 “김학순씨는 일본 정부에 사과하고 배상하라고 요구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녀의 용감한 행동을 보고 다른 위안부들도 앞으로 나왔고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에 함께했다”며 “아시아 일본군 위안부들을 유럽 여성들이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끔찍한 기억을 딸들에게 공책 한 권에 써서 건넸다. 글을 쓰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글을 쓰며 번번이 멈췄고 당시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생생했기 때문이다.

마음속에 묻어둔 고통을 꺼내 미래를 살아갈 이들에게 ‘비극의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게 하려고 나섰다. 50년간 침묵해 왔던 이야기를 담은 단행본을 출간했다. 「나는 일본군 성노예였다」다. 이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쓴 최초의 단행본이다.

책에는 ‘위안부’의 존재를 세상에 밝힌 김학순씨뿐 아니라 고(故) 김군자·길원옥씨 이외에도 본명을 밝히지 못하는 이들의 생생한 이야기가 담겼다.

2007년 3월 8일 호주 시드니 국제 여성의 날 집회에서 함께한 저자 얀 루프-오헤른씨와 길원옥·황우슈메이씨(앞줄 오른쪽부터). 삼천리출판사 제공

저자는 위안소에서 3개월가량 밤낮으로 강간과 폭행을 당했다. 하루에 최소 10명의 일본군을 상대했다. 그때의 고통과 상처는 아직도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고 말했다.

책은 단순히 한일 간의 문제만으로 채워지지 않았다. 우리가 몰랐던 20% 여성들의 참혹했던 기억을 회고하면서 위안부 문제는 인류 보편의 ‘인권문제’임을 짚는다.

저자의 자서전 형식이지만 가해자에 대한 화해의 메시지를 담는 한편, 역사와 여성 인권, 미래 세대를 위한 대목도 나온다. 아울러 부끄러운 역사일지라도 과거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후세에게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한다.

“강간은 이제 전쟁범죄로 여겨지고 있고, 유엔도 그렇게 인정했다. 내가 이렇게 나서서 이야기하는 목적은 단 하나, 전쟁에서 잔혹행위가 더 이상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나는 일본군 성노예였다」에는 1장 ‘아름다운 어린 시절’, 2장 ‘암바라와 포로수용소’, 3장 ‘칠해정’, 4장 ‘가족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5장 ‘한 시대의 끝’, 6장 ‘침묵을 깨다’ 등이 담겼다.

권세희 기자 se2@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