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헬기조종사의 병영일기] 높은 놈, 낮은 분

이연세(요셉) 예비역 육군 대령·동서울대학교 교수
입력일 2018-05-08 수정일 2018-05-08 발행일 2018-05-13 제 3094호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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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발이 성성한 신부님이 제대 옆으로 주춤주춤 나오더니 차디찬 대리석 바닥에 엎드려 큰절을 했습니다. 교중미사를 봉헌하는 신자들을 향한 인사였는데, 노신부님의 얼굴은 벌겋게 변했습니다. 강론 말미에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하마터면 “아!”하는 외마디를 지를 뻔했습니다. “칠순이 넘으신 신부님께 큰절을 받다니.” 황망하여 순간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지난달 중순, 원주교구 소속인 신부님이 저의 본당 미사를 공동집전 했습니다. 신부님은 강론 중에 주님의 뜻을 받들어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시키고 성전을 건립하는 데 온 열정을 바쳐 왔음을 고백했습니다. 턱없이 부족한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신부님이 기울인 각고의 노력들은 가슴을 뭉클하게 했습니다. 공소의 신자들을 위해 은퇴까지 미루며 성전을 세워 편안하게 미사를 봉헌하도록 애를 쓴 신부님! 가장 낮은 자세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신부님으로부터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미사 후 내내, 권위는 조금도 내세우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과 신자들 사랑에만 몸과 마음을 다하는 신부님과 과거 저의 부족함이 대비돼 부끄러웠습니다. 엄격한 계급 사회인 군에서는 권위와 우월의식이 지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업무 중은 물론이고, 각종 행사시 서열에 따른 좌석 배열을 잘못했다간 난리가 납니다. 비공식 자리에서도 서열은 칼같이 지켜집니다. 어떤 이는 회식장소에서 자신의 자리가 잘못됐다며 불같이 화를 내고 가버린 예까지 있으니까요. 눈에 보여지는 자리와 계급이 곧 권위를 상징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물론 군 성당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좌석은 통상 간부와 병사로 나뉘어 있습니다. 간부들의 자리가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계급 높은 사람이 앞쪽에 위치하고 뒤쪽으로 갈수록 계급이 낮은 사람 순으로 앉게 되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깁니다. 성전에서조차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니….

오랫동안 군 성당에서 사목회장 직(?)을 수행했던 저의 자리도 거의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주일 당연히 비어있어야 할 자리에 누군가 앉아 있었습니다. 갑자기 의아한 기분이 들며 ‘누가 감히 사목회장 자리에 앉았어!’라는 못난 자존심이 뿔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외부에서 면회를 온 분이었습니다. 저도 앞자리에 앉으며 권위의식을 내세우지 않았을까요.

군종교구 내 냉담하는 신자들 중에는 계급으로 인한 불편함 또는 상처 때문에 신앙생활을 멀리하는 신자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들의 심중에는 ‘부대에서도 계급에 따른 차별이 있는데 신앙생활에서조차 그럴 수는 없다’라는 생각이 내면에 깔려있음을 느낍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11-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내면에 자리 잡은 높은 자리에 대한 욕심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강원도 산골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하느님만을 섬기며 살아가는 신부님이 가장 높은 분이 아닐까요.

이연세(요셉) 예비역 육군 대령·동서울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