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멀어짐, 그러나 시작
‘떠남’과 ‘시작’이라는 이중적 기능은 오늘 복음의 서두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승천이 ‘하늘에 오르심’을 목적에 둔 사건이라기보다, 제자들을 멀리 ‘파견’하시기 위한 의도와 연결되어 있음을 차례로 알려줍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16,15)는 명령과, 예수님께서 이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그동안의 제한받던 존재 방식을 끝내시고 하늘로 오르시어 언제 어디서나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16,20) 동반하심을 명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상생활 동안 갈릴래아나 예루살렘의 시·공간에 머무시던 예수님은 이제 승천이라는 새로운 사건을 통해 그 어떤 장소적·시간적 제약도 받지 않으시는 존재로 거듭 현존하시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셨지만 사실은 교회 안에 언제나 함께 계신다는 약속은 오늘 복음의 17-18절을 통해 분명히 확인됩니다.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이는 교회가 하는 일이 곧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일임을 증거하는 “표징”이 됩니다(20절 참조). 즉 승천하신 예수님께서는 교회와 함께 하시면서 교회의 선포와 사명을 통해 자신의 현존을 지속적으로 드러내고 계신 것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표징을 위해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강력한 힘과 권위를 지니시는 것이었고, 이를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하늘로 오르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16,19)고 묘사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하늘”이라는 초월적 장소에 오르시고, 유다인들 전통에서 언제나 힘과 권력을 상징하는 “오른쪽”(주로 오른손잡이가 많으므로 오른쪽이 더 큰 힘을 가진다고 간주)에 계시게 되었으며, 더구나 “앉으셨다”고 함으로써 확고부동한 영광과 권위의 자리에 오르셨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 유기체적 공생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오른편에 좌정하심은 제2독서에서도 등장합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의 인성(人性)은 이제 하느님의 권좌로 옮아가게 되며, 그 어떤 통치와 권력보다 더 강한 권한을 지니시게 됩니다. “모든 권세와 권력과 권능과 주권 위에 그리고 현세만이 아니라 내세에서도 불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되신 것인데(21절) 에페소서의 저자는 여기에 매우 중요한 사실 하나를 덧붙입니다. “만물 위에 계신 그분을 교회에 머리로 주셨다”(22절)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그렇게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계신 분을 우리의 “머리”가 되게 하셨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신비체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모든 면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로 충만해”(23절) 있게 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일은 이제 교회의 일로 이어지고, 제자들과 교회는 그리스도의 능력에 힘입어 하느님의 일을 하게 됩니다.
■ 성령강림을 고대하며
우리가 그분과 한 유기체를 이룬다는 놀라운 사건은 사실 성령에 의해 가능해지는 신비입니다. 이에 대하여 제1독서는 “성령께서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사도 1,8)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승천은 이 세상으로부터의 멀어짐 혹은 떠나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에로의 더 깊은 유착과 뿌리내림을 의미합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약속하신 것이고, 이 말씀대로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한마음으로 기도하며 ‘성령강림’을 기다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성령에 대한 약속으로, 이제 주변의 사소한 불안과 두려움을 거두고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똑똑히 깨닫게 되는 빛나는 초대의 시간에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현존과 부재의 딜레마는, 단순히 오늘 전례의 본문들이 제작될 때만의 문제가 아니라, 여전히 오늘날에도 시험과 도전이 되는 주제입니다. 누군가를 더 이상 보지 않고 만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의 가르침을 준수하며, 그가 원하는 삶을 온전히 구현하여 내 삶의 현장 안에 새로운 생명과 빛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충실한 따름과 사랑은 없을 것입니다. 내 삶의 믿음과 질서를 뒤흔들어 놓는 가혹한 멀어짐이나 상실이라 해도, 그 치열한 슬픔은 오히려 우리를 더욱 빛나는 존재로 성장시키는 은총이요 초대가 될 수 있습니다. 주변에 아무도 없고 아무것도 없을 때에야 비로소, 나를 동반해주시는 유일한 존재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인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부재와 현존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것도 지니지 않고 세상 끝까지 혼자 간다고 해도 결코 두렵거나 지치지 않고 그 빛나는 구원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그 환한 빛이 흔들림 없이 투명하게 그와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