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교회

[글로벌 칼럼] (17) 독신과 사제직 / 아마도 피카달 신부

아마도 피카달 신부
입력일 2018-05-01 수정일 2018-06-27 발행일 2018-05-06 제 3093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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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시간과 에너지를 교회와 사제관을 꾸미고, TV를 보며, 게임과 쇼핑, 인터넷 서핑에 허비하거나 자신만을 위한 사업에 몰두한다면 사제의 독신은 공허하고 의미가 없게 된다.”

몇몇 사제들 사이에서 독신제를 폐지하고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요구가 나오고 있다. 이들에게 독신은 수용하기 매우 힘든 짐임이 분명하다. 이들은 독신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면 지금처럼 사제성소가 부족한 상황에서 더 많은 이들이 사제직의 길에 들어설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성직 수행에 독신은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교회가 생기고 첫 1000년 동안 대부분의 사제, 심지어 주교들도 결혼을 했다. 가톨릭교회가 사제 독신을 의무화한 것은 12세기였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많은 이들이 교회가 곧 사제 독신을 포기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교회는 사제 독신은 적절하다고 판단해 사제직을 위한 필수사항으로 유지하고 있다. 다만 동방교회 소속 사제와 개종한 성공회 사제에게만 결혼을 허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교회가 사제 독신을 유지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 근거로 들며 독신 생활의 모범으로 삼고 있다.

유다인은 결혼해 가정을 꾸리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에 예수가 독신을 지킨 것은 드문 일이었다. 예수가 살던 시절, 유다 사회에서 결혼은 일반적이었다. 심지어 성전의 사제들도 결혼을 했다. 당시 독신은 반문화적이며 유다교 교리에도 반하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예수는 어떻게 자신의 독신을 정당화시켰을까? 예수에게 독신은 하느님 나라를 위한 일이었다. 하느님 나라의 선포는 예수의 사명이었고, 예수는 이를 위해 그의 모든 관심과 시간, 에너지를 쏟아 부었다. 예수는 독신 생활을 통해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한 그의 완전한 헌신을 철저하게 보여준 것이다.

결혼해 가정을 꾸리는 대신, 예수는 전 생애를 공동체를 낳고 키우는 데 헌신했다. 예수는 하느님의 가정으로 구성된 공동체를 만들었다. 이 공동체는 혈연이 아니라 세례와 성령을 통해 같은 신앙을 가졌으며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서로를 형제자매로 인식했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위해 자신을 완전히 헌신할 것을 결정한 제자들에게도 독신을 추천했다. 하지만, 예수가 모든 이에게 독신을 강조한 것은 아니다. 심지어 제자들에게도 독신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짐작컨대 제자들은 결혼을 했으며, 베드로에게는 장모가 있었다. 하지만, 제자들은 로마제국 전체에서 자신들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가정과 아내, 자녀들을 포함해 모든 것을 내려놨다. 이방인의 사도 바오로도 독신을 지켰으며, 하느님께 의탁해 선교사명을 수행하는 이들에게 독신을 추천했다.

예수가 독신을 지킨 것은 성과 결혼, 가정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가졌기 때문이 아니다. 예수의 독신은 하느님 나라 선포라는 자신의 사명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였다. 예수의 사랑은 한 여성이나 자녀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닌 포괄적이며 보편적인 형태였다. 따라서 예수의 독신은 이후 교회의 성직자에게 기준과 모범이 됐다. 교회가 사제 독신을 보편적으로 받아들이기에는 1000년이 넘게 걸렸다.

예수의 모범을 따른 사제의 독신은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위한 사제들의 헌신을 보여주는 근본적인 표현이 돼야 한다. 사제들은 복음을 선포하고, 사회악과 대항한 예언자의 역할을 하며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지도한다. 또한 공동체 안에서 전례와 성사를 주례하며, 정의와 평화, 개발, 창조보전을 위한 일을 하며,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돌본다. 독신생활을 통해 사제는 모든 관심과 시간 에너지를 이러한 사목과 복음화 수행에 집중할 수 있다.

이럴 때에만 사제들의 독신은 의미를 가지며 독신으로 살아가기가 수월해진다. 독신은 멍에나 짐이 아니라 사제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위한 사목활동을 수행할 수 있도록 더 많은 자유를 주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과 에너지를 교회와 사제관을 꾸미고, TV를 보며, 게임과 쇼핑, 인터넷 서핑에 허비하거나 자신만을 위한 사업에 몰두한다면 사제의 독신은 공허하고 의미가 없게 된다.

사제가 사람들, 본당 신자, 가난한 이웃에게 시간을 내주지 않거나 기도 안에서 하느님을 만날 시간을 갖지 않는다면 사제의 독신은 또한 공허하고 의미가 없게 된다. 이렇게 되면 사제의 삶은 지루하며 외롭게 돼 ‘육체의 유혹’에 쉽게 빠지게 된다.

독신이 사제의 사목, 사명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지 않다면, 하느님 나라를 실현시키는 데 더욱 헌신하지 못한다면, 사제의 독신은 무책임한 독신자를 낳을 뿐이다. 독신이 하느님 나라를 위한 희생적인 헌신이라는 진정한 징표가 되지 못하고 이기와 방종의 징표가 돼서는 안 될 것이다.

※필리핀 구속주회 사제인 아마도 피카달 신부는 인권증진 활동으로 유명하다. 피카달 신부는 필리핀 주교회의 소공동체위원회 총무이며, 교회 내 다양한 문제에 대해 아시아가톨릭뉴스를 포함해 여러 매체에 칼럼을 쓰고 있다.

아마도 피카달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