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민범식 신부의 쉽게 풀어쓰는 기도 이야기] 은총에 이끌린 삶 3

민범식 신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rn서울대교구 소속으로 2003년 사제품
입력일 2018-04-24 수정일 2018-04-24 발행일 2018-04-29 제 3092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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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은총을 뒤늦게 깨닫는 것은 당연한 일
감각적 경험과 달리 상징으로 알 수 있는 영적 체험
수동적으로 주어지기 때문에 성찰 뒤에 알 수 있어

찬미 예수님.

살아가면서 우리가 종종 하는 말이 있습니다. “돌아보니 모든 것이 은총이었습니다”라는 말입니다. 어떠세요? 이 말에 동의하십니까? 이 말을 듣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분도 계실 겁니다. 하지만 또 어떤 분들은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하시겠죠. 뭔가 있는 것 같기는 한데, 그것이 정말 하느님의 은총인지는 확신하기 어렵다고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 은총의 삶은 늘 이렇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청하고 그 안에서 살아간다고 고백하지만, 정작 하느님의 은총이 어떻게 주어지는지는 잘 모르는 것이죠. 왜 그럴까요? 답부터 말씀드리자면, 하느님의 은총은 우리 인간의 감각적인 경험 안에서가 아니라 영적인 경험 안에서 체험되기 때문입니다.

감각적인 경험은 자연적 가치들, 곧 우리가 일상 안에서 추구하는 일반적인 내용들을 대상으로 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 신체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음식이나 건강을 추구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심리 차원에서 자존감이나 성취감을 추구하는 것, 그리고 어떤 일을 계획해서 이뤄가는 것 등이 이러한 감각적 경험에 속하죠.

감각적인 경험 안에서 우리는 처음부터 자신이 찾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시장에 장을 보러 갈 때도 무엇을 사야 할지를 분명하게 알고 갑니다. 입시를 준비하는 수험생도, 직장을 찾는 취업준비생도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목표를 분명히 세우고 목표를 이루기 위해 일련의 과정을 밟아갑니다.

이처럼 감각적인 경험의 대상을 분명히 알 수 있는 이유는, 그 대상을 알아보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삶을 추구한다면, 몸의 건강을 드러내는 표지가 무엇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죠. 적절한 체중과 또 각종 검사를 통해 드러나는 수치를 보면서 우리는 자신이 건강한 상태인지 아닌지를 알게 됩니다. 장을 보러 갈 때에도, 우리 식구가 좋아하는 반찬이 뭔지를 분명히 알고 있고 그래서 장에서 생선이든 고기든 나물이든, 그 중에서도 더 싱싱하고 좋은 것으로 드러나는 대상을 찾아서 살 수 있습니다. 그 안에서 우리 자신이 주도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죠.

그리고 감각적인 경험은 우리가 추구하던 것을 찾는 것, 곧 목적을 완성하는 것으로 끝나게 됩니다. 그래서 이 경험을 하면서 느끼는 감정은 우리의 능력과 연관된 감정입니다. 찾던 것을 발견함으로써 뿌듯함을 느끼거나, 아니면 찾지 못해서 스스로의 능력에 실망하게 되는 감정입니다.

감각적인 경험이 이런 특성을 지니고 있는 반면, 영적 경험은 초자연적 가치를 향해 움직여가는 과정입니다. 초자연적 가치란 진실함이나 용서, 사랑과 같은 도덕의 가치들이나 하느님, 은총, 복음삼덕과 같은 종교적 가치를 의미합니다.

이 영적 경험 안에서 우리가 찾는 대상은 우리에게 감각적으로, 있는 그대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만나기 원하지만 하느님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볼 수 없다는 거죠. 은총도 마찬가지입니다. 은총을 선물로 받는다고 말하지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선물을 주고받는 것과는 분명 다른 모습이죠. 그렇기에 영적 경험의 대상은 상징을 통해서 우리에게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을 우리는 십자가라는 상징을 통해서 알아듣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영적 경험의 대상은 상징을 통해서 드러나기 때문에, 우리는 영적 경험 안에서 자신이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지 못합니다. 그저 무언가를 찾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뿐이죠. 믿음이 성장하기를 바라지만 믿음이 성장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알지는 못합니다. 우리 믿음을 점수로 표시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영적 경험 안에서 우리는 수동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에서 느끼게 되는 감정은, 앞서의 감각 경험에서처럼 우리 능력과 연관된 감정이 아니라, 경탄의 감정입니다. ‘아, 그렇구나! 바로 이거였구나!’ 막연하게 찾아 헤매던 것을 뒤늦게 발견하고 깨닫게 되는데서 오는 기쁨과 놀라움의 감정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 뒤에 오는 것은 우리의 존재론적인 변화, 곧 회심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더 깊이 깨닫게 되는 그만큼 우리가 살아가는 실제의 방식이 바뀌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을 더 닮은 모습으로요.

감각 경험과 영적 경험이라는, 조금은 복잡한 내용으로 말씀드렸지만 사실 이러한 부분은 우리 각자가 이미 경험하고 있는 부분들입니다. 일상 안에서 우리 자신이 주도적으로 계획하고 찾고 성취해 나가는 부분들, 바로 감각 경험들이죠. 반면에 나는 누구인지,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지, 나의 삶 안에 하느님께서 어디 계시는지 하는 부분들을 고민하는 모습이 바로 영적 경험들입니다.

다시 은총 이야기로 돌아가면, 하느님의 은총을 경험하는 것은 이처럼 영적 경험 안에서이기 때문에 우리가 늘 뒤늦게 은총을 깨닫게 되는 것은 한편으로는 당연한 일입니다. 은총에 대한 체험은 상징을 통해서, 또 수동적으로 주어지기 때문에,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에 그 사건을 되돌아보고 곰곰이 성찰할 때에야 그 안에서 활동하셨던 하느님의 은총을 알아차리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돌아보니 모든 것이 은총이었습니다”라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을 그저 좋은 것으로만 포장하면서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 안에서 참으로 하느님을 만나게 될 때 터져 나오는 참된 고백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은총 체험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더 없을까요? 늘 이렇게, 다 지나고 난 후에야 깨닫게 되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할까요?

주어진 은총을 깨닫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 시간을 줄일 수는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전 같으면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아, 그때 그것이 하느님 은총이었구나!’ 깨달았었다면, 이제는 조금만 시간이 흘러도 받은 은총을 금세 깨달을 수 있을 거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시간이 점점 더 줄어든다면 우리는 매 순간 하느님 은총을 느끼면서 살아갈 수 있겠죠. 바로 ‘하느님의 현존’ 안에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럴 때 우리의 삶이 은총의 삶이 되고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우리 삶에 이미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청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할 일은 이미 주어져 있는 은총을 깨닫는 것뿐입니다. 돌아보면 모든 것이 은총이지만, 지금 이 순간도 은총의 순간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2코린 6,2)

민범식 신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rn서울대교구 소속으로 2003년 사제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