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말씀묵상] "내 목소리를 알아 듣고”

장재봉 신부(부산교구 선교사목국장)rn로마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윤리신학 박사를 취득하고 부
입력일 2018-04-17 수정일 2018-04-17 발행일 2018-04-22 제 3091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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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4주일 (사도 4,8-12   1요한 3,1-2   요한 10,11-18)
선교에 게으르고 사랑함에 계산적인 나의 모습
주님 말씀을 따르지 않게 하는 걸림돌은 아닐까

지거 쾨더의 ‘착한 목자’.

오늘 복음말씀이 참 따뜻합니다. 스스로 ‘착한 목자’라고 말씀하시는 주님 음성이 더없이 다정하고 친근하게 들립니다. 주님을 따르는 일이 하나도 힘들 것 같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주님 곁에 머물며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앞뒤 문장을 읽으면서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이 말씀을 하신 곳이 푸른 하늘이 펼쳐진 평화로운 들녘도 아니고 잔잔한 물소리가 흥겨운 갈릴래아 호숫가도 아니니까요. 하물며 주님의 말씀에 발끈한 유다인들이 “돌을 집어” 던지려고까지 했던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으니 말입니다. 바로 그때에 예루살렘에서는 성전 봉헌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으며 ‘겨울’이었다는 요한의 기록도 마음의 냉기를 더하게 합니다.

하지만 오늘 이 말씀이 그 추운 때, 길에서 구걸하며 지내던 태생 소경의 눈을 뜨게 해주신 일에서 비롯되었다는 것, 자신을 고쳐준 은인을 뵙고 싶어 했던 간절한 소망에 응답해주신 결과라는 사실에 마음을 데워봅니다.

아울러 1독서가 전해주는 사건 현장에 베드로 사도와 요한 사도가 함께 있었다는 게 마음에 담기는데요. 막강한 유다 지도자들과 원로들과 율법학자들이 합세하여 신랄하게 추궁해 왔지만 전혀 기죽지 않고 ‘똑 부러지게’ 진리를 증거하는 그들의 담대함이 너무 멋진 겁니다. 이야말로 부활인으로 거듭난 주님 제자의 모습이라 싶은 겁니다.

그래서일까요?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라는 요한 사도의 권고가 내내 귓전에 맴을 돕니다.

사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 특별한 무엇인가를 한 것이 없습니다. 하느님께 특별히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을 갖추어서 그분의 자녀가 된 것이 아닌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왜 하느님께서 나를 자녀로 삼으셨는지 이유를 모릅니다. 때문에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각별히 선택하여 당신의 자녀로 살게 해 주셨기에 감격합니다. 헤아릴 길 없는 하느님의 축복이라 고백하고 갚을 길 없는 은혜라는 것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오직 당신 자비에 따른 일방적 선물이기에 그 은혜에 보답하며 살아갈 것을 다짐하고 주님의 계명을 기쁘게 살겠다는 약속도 합니다. 그럼에도 수도 없이 주님의 생각과 동떨어진 모습에 붙들려 지냅니다. 결코 주님의 뜻이 아닌 행동에 익숙한 채로 살아갑니다. 면구스럽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복음서를 살피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나를 믿으라”는 말씀보다 “나를 따르라”고 이르신 적이 훨씬 더 많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당신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서 당신의 뜻을 철저히 살아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지요. 걸핏하면 주님을 잃고 헤매면서 목자이신 주님의 속을 썩이는 못난이 양 노릇을 하고 지내는 겁니다. 이렇게 당신의 뜻은 뒷전에 두고, 주님께 등을 보이며 살아가는 우리 모습에 주님의 애간장이 바짝 타들어 갈 것만 같습니다.

주님을 제대로 따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분을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똑바로 주님을 바라보며 쫓아야 그분을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요. 보이지 않으니 귀를 열어야 합니다. 그분의 음성이라도 잘 들을 수 있어야 제대로 따를 수가 있을 테니까요. 한마디로 주님 음성을 잘 듣는 것이 믿음의 관건인 셈인데요.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오늘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따른다”고 분명히 밝혀 주신 것이라 싶습니다. 복음 선교에 게으르고 사랑함에 계산적인 내가 바로 주님의 뜻에 걸림돌이라는 것, 주님의 말씀과 따로 노는 내가 바로 당신의 뜻을 이루는 일에 훼방꾼이라는 걸 분명히 깨달으라는 일침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분의 몸을 이루는 당신의 세포입니다. 우리가 곧 주님을 모신 교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의 문제는 그분의 몸인 줄을 모른 채, 그저 그분을 좋아하는 팬인 줄로 착각하는 데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싶습니다. 세례를 받고 신앙인이 된 후에도 다만 주님의 능력을 추앙하고 주님의 자비를 즐기며 주님의 축복만 탐한다면 말입니다. 주님의 영광과 명성과 힘을 이용해서 자신의 유익을 도모하려는 속셈을 가졌다면 말입니다. 이야말로 하느님의 자녀가 아닌 팬에 불과하다는 얘기입니다. 물론 이런 마음을 꼭 나쁘다고 할 수는 없을 겁니다. 때문에 그릇되다고 지적하거나 꾸중하기가 모호합니다. 인간은 어차피 모든 것을 주님께로부터 공급받아 살아가는 존재이니까요. 하지만 전능하신 하느님을 찬미하고 찬양하며 감사드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는 한참 동떨어집니다. 몹시 어긋납니다.

주님 제자의 자격은 성당에 이름을 등록한 것으로 취득되지 않으며 미사에 참례하여 헌금을 봉헌하는 것으로 완수되지 않습니다.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을 때마다 불쑥, 급하고 간절하게 기도하여 뭔가를 얻어내기 위한 방편은 더더욱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당신의 뜻에 의탁하는 순명을 원하시고 우리 모두가 당신과 동행하기 바라십니다. 오늘도 우리를 통해서 아직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우리들이 데려올 당신의 자녀들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계십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인에게는 ‘할례받은 귀’가 필요합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 하느님의 목소리에 민감하게 살아가는 예민함이 필수입니다.

예수님은 당신께 자신의 전부를 투신했던 몇 사람의 제자를 통해서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제자들이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주님의 뜻에 완전히 순명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주님의 나라를 향한 길에서 후회하지도 돌아서지도 않고 계속 도전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저는 지금 솔로몬 왕을 생각합니다.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1열왕 3,9)라는 솔로몬의 기도에 무척 기뻐하셨던 하느님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오직 “듣는 마음”만 청했던 솔로몬에게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과 함께 “청하지 않은 것, 곧 부와 명예”까지 아낌없이 쏟아주셨던 사실에 마음이 설렙니다.

성소주일, 세상의 모든 교회가 한 마음으로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따르게 되기를 간구하고 있으니 얼마나 기뻐하실까 싶습니다. 우리에게도 꼭 주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는’ 축복에 곁들여 감히 청하지 못한 좋은 것까지도 모두 채워주실 것이라 확신하게 됩니다.

장재봉 신부(부산교구 선교사목국장)rn로마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윤리신학 박사를 취득하고 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