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민범식 신부의 쉽게 풀어쓰는 기도이야기] 은총에 이끌린 삶 2

민범식 신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rn서울대교구 소속으로 2003년 사제품
입력일 2018-04-17 수정일 2018-04-18 발행일 2018-04-22 제 3091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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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저 주시는 은총도 알아볼 수 있도록 깨어 있어야
이해 없이 맹목적으로 믿는 것은 ‘그릇된 신념’
 신앙은 믿을만한 근거에 대한 체험으로 성장해

찬미 예수님.

지난 한 주 동안 하느님의 은총을 많이 받으셨습니까?

은총에 대해 말씀드리면서,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본성적인 능력을 무시한 채 당신 마음대로 은총을 주지 않으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첫째로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지성이나 감정, 의지나 양심 같은 본성적인 능력을 존중하면서 은총을 베풀어 주시고, 둘째로는 그러는 가운데 우리 각자의 협력을 요구하신다고 말씀드렸지요.

전에 말씀드렸던 믿음의 경우가 바로 그렇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향주덕의 하나로서 결국에는 하느님 은총으로 이뤄지는 신덕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자신의 믿을 수 있는 능력과 전혀 상관이 없는 덕은 아닙니다. 은총의 차원에까지 이르지 않더라도 모든 인간은 근본적으로 믿을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이성으로 곰곰이 따지고 살펴서 믿을 만하다고 판단될 때 우리는 믿게 되죠. 그리고 때로는 그 믿을 만함이라는 근거가 부족할 때에도, 정말 그런지 아닌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믿고 싶은 마음 때문에 믿기도 합니다. 희망도,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인간적인 차원에서도 무언가를 바라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믿을 수 있는 힘은 우리 신앙에도 마찬가지로 요구됩니다. 성경에 쓰여 있는 말씀이 아무리 해도 이해되지 않고 받아들여지지 않는데 성경 말씀이니까 무조건 믿어야 한다고 해서 믿는 것이라면, 이는 건강한 믿음이 아닙니다. 그저 맹목적인 믿음 또는 그릇된 신념일 뿐이죠.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질문하지 않는 신앙은 그 자체로 질문을 받아야 할 신앙’(「교황청 고위 관료들에게 한 성탄 인사」 2017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신앙을 정말로 삶의 중심에 놓고 살고 있는지, 우리 믿음의 대상이 누구인지, 하느님을 어떻게 믿고 있는지를 계속해서 물어보고 성찰하지 않는 신앙이라면, 먼저 그 신앙이 제대로 된 신앙인지를 물어봐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믿음이라는 행위가 시작되기 위해서는 우리 인간의 기본적인 이해와 상식에 맞는 근거들이 필요합니다. 믿을 만해야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타나셨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성경의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떻게 하시죠? ‘나는 너희 선조들의 하느님이다’(탈출 3,15 참조) 말씀만 하시고는 아무것도 안 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무조건 믿기를 바라시나요? 그러지 않으시죠. 이스라엘 백성이 당신을 하느님으로 믿게 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당신 백성을 돌보십니다. 홍해 바다를 건너 그들을 구해내시고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주시고, 그 이후에도 많은 일을 그들에게 해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정말로 하느님을 주님으로 믿을 수 있도록 계속해서 근거를 마련해 주시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의 예수님도 마찬가지십니다. 군중에게 하느님 나라의 복음과 구원을 선포하시면서, 그저 말씀만으로 당신을 믿으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 나라가 어떤지에 대해서 가르치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병자를 고쳐주시고 마귀를 쫓으시고 그밖에 다른 기적을 많이 행하시죠. 그를 통해 사람들이 보고 듣고 믿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들으면서 ‘정말 그럴까?’ 하고 믿지 못하던 사람들이 그분께서 행하시는 기적을 체험하면서 ‘아, 정말 그렇겠구나!’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믿음이 이처럼 인간적인 이해와 근거에 바탕을 둔 차원에만 머물지는 않는다는 것은 이미 말씀드렸지요? 인간적인 차원에서 주어지는 근거들을 체험하면서 우리의 믿음은 성장하게 되고, 더 나아가서는 그 근거를 뛰어넘는 신비의 차원에까지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지성으로 잘 이해할 수 없는 삼위일체의 신비나 예수님의 신성, 부활의 신비 등을 믿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이죠. 이렇게 인간적으로 믿을 수 있는 대상을 넘어서서 알 수 없는 신비의 차원까지 나아가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은총으로 인해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바로 우리 인간의 협력이 요구됩니다. 어떤 협력일까요?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의 믿음은 그 믿을 만한 근거에 대한 체험과 함께 성장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체험이라는 것 자체는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죠. 똑같은 상황에서 똑같은 일을 겪었더라도 그 일을 받아들이는 모습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그 사건 안에서 특별한 의미를 발견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별 상관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매우 다양합니다. 각자가 살아온 삶의 역사가 달라서 그 안에서 형성된 사고방식이나 감정적인 반응, 또 추구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 대표적인 모습을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르코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자렛 고향 마을에 가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안식일이 돼 회당에서 가르치셨는데,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 반응이 다양하죠. 어떤 이들은 예수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면서 예수님을 좋게 말하기도 하지만(루카 4,22 참조), 또 다른 이들은 예수님더러 목수이고 마리아의 아들이며 또 그의 누이들도 자신들과 함께 나자렛에서 살고 있다고 말하면서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마르 6,3 참조) 똑같은 상황이지만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체험하는 모습에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이야기의 결말이 결국에 어떻게 되죠?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마르 6,5-6)라고 복음사가는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일깨워주기 위해 일부러 기적을 행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몇몇 사람의 병을 고쳐 주시는 것 외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하실 수 없었던’ 일이 있다는 이 성경 표현이 놀랍지 않으신가요?

하느님께서는 늘 우리에게 당신의 은총을 주고 싶어 하십니다. 그렇게 거저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에 은총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 은총을 잘 받기 위해서 우리 자신의 준비가 필요하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준비가 잘 돼 있으면 은총을 더 받고 준비가 덜 돼 있으면 은총을 못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우리의 준비나 자격 여부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라면, ‘거저’ 주어지는 선물이라고 할 수 없을 테니까요.

하느님 은총은 늘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우리가 받아들이느냐 안 받아들이느냐, 은총으로 알아차리느냐 못 알아차리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앞서 말씀드렸던, ‘응답에 대한 책임은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하느님의 은총을 어떻게 알아차리고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민범식 신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rn서울대교구 소속으로 2003년 사제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