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세상살이 신앙살이] (429) 문어 네 마리

강석진 신부(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입력일 2018-04-03 수정일 2018-04-03 발행일 2018-04-08 제 3089호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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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에 하루, 너무나 쑥스러운 날이 본명 축일입니다. 수도원 형제들과 아는 교우분들이 축일 축하를 해 주시는데 왜 그리 부끄러운지! 아마도 ‘주보성인’만큼 잘 못 살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며칠 전 본명 축일에도 그랬습니다. 미사 후 형제들이 식탁 위에 축일 케이크를 놓고, 내가 식당에 들어오자 케이크에 불을 붙인 후, ‘축하합니다’ 노래를 불러주었는데, 나는 속으로 ‘이 순간 또한 다 지나가리라…. 아, 지나갈 거면 빨리 좀 지나갔으면…’하고 조바심을 냈습니다. 그렇게 축일 축하 노래가 끝나고, 박수를 받은 후 수사님들 한 분 한 분과 축하 인사를 나누다보면 축일이 지나갑니다.

그렇게 축일을 보내는데 문자가 한 통 왔습니다. 평소에 나를 친조카처럼 생각하시는 오랜 지인이신 할머니 한 분이 정성스레 보내온 문자였습니다.

“우리 조카 신부님, 오늘 축일 축하해요. 내 고향분에게 부탁해서 문어를 주문했어요. 오늘 낮에 수도원에 도착할 거예요. 수사님들과 저녁식사 때 맛있게 드세요.”

삼천포에서 문어가 배달될 예정이라는 문자를 받는 순간 떠오른 생각이 ‘헐, 문어가 올라온다! 아…, 오늘 하루는 왠지 조용히 지나갈 것 같지 않은데…!’ 그런데 정말이지 오후 2시쯤 되어, 그날 새벽 남해바다에서 잡은 문어가 수도원 마당으로 배달되었습니다.

너무나도 싱싱한 대왕 문어 4마리. 아직도 살아서 밖으로 나오려 꼼지락, 꿈틀거리는 문어를 신기하게 쳐다보면서 짧은 시간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이 문어를 어떻게 하나. 제주도에서만 보던 돌문어는 아니고. 남해 문어라…. 음, 그냥 주방 수녀님들에게 맡겨서 알아서 아무 요리나 해 달라고 말할까. 아니면 싱싱한 바다, 자연의 맛을 살리기 위해 그냥 내가 요리를 해 버릴까! 그래, 내가 요리를 한다면, 오늘 저녁 주방 담당 수녀님께는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을 드리지? 맞다. 오늘 내가 개인적으로 해야할 일이 많지, 많아! 그래, 요리를 못하겠다. 아니다. 우리 수도원 형제들이 오랜만에 문어 요리를 맛있게 드실 수 있다면, 바쁜 일이 문제겠어. 내 본명 축일, 그래, 오늘 하루 본명 축일 기념으로 형제들에게 문어 요리를 먹는 기쁨을 나누는 것도 좋겠다. 에이, 오늘 일은 내일로 넘기고, 오늘은 이 문어와 함께 하루를 보내자.’

이내 곧 수도원 경리 수사님과 함께 주방에 가서 수녀님들께 오늘 저녁에 문어 요리를 할 예정이라 주방을 쓰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경리 수사님도 바쁜 일정을 포기하고 팔을 걷어 붙이고 문어요리를 도와주기로 했습니다. 본격적인 문어요리를 시작하면서, 우선 살아있어 너무나 힘이 좋은 문어 4마리를 손질했고 내장과 먹물을 뺐습니다.

그리고 한 마리는 ‘문어죽’을 하려고 푹– 삶았고, 그 삶은 물로 문어죽을 만들었습니다. 두 마리 문어는 문어숙회를 했고, 나머지 한 마리는 문어무침을 하였습니다. 특히 문어숙회와 문어무침을 위해서 펄펄 끓은 물에 문어를 담근 후 식초를 넣고 1분30초 정도 삶아 건졌습니다. 문어가 질겨지지 않고 씹는 식감도 쫀득하게 하려고. 그렇게 요리를 하다보니 저녁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날, 저녁 식사 시간에 수사님들과 문어죽, 문어숙회, 문어무침을 나누며 본명 축일을 형제들과 기쁘게 지냈습니다.

일 년에 한 번, 본명 축일이 되면 부끄럽기 그지없던 날, 오랜만에 주방에 가서 나의 ‘주보성인’ 흉내를 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걱정도 사라지고 형제들과 더 큰 행복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위해 시간을 내고 봉사를 하는 일. 그 자체로 큰 기쁨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지만 참 오랜만에 다시 깨닫게 되었습니다. 문어랑 그 할머니 덕분에…!

강석진 신부(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