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민범식 신부의 쉽게 풀어쓰는 기도이야기] 성장하는 믿음

민범식 신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rn서울대교구 소속으로 2003년 사제품
입력일 2018-03-20 수정일 2018-03-20 발행일 2018-03-25 제 3087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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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을 본 적 있나요?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삶의 여정 안에서 계속 성장해 가는 것
하느님 만나는 체험 쌓으며 굳건한 신앙 키워야

찬미 예수님.

하느님의 사랑을 믿으십니까? 하느님께서 나의 행복을 바라시고 그 바람으로 나의 삶을 이끌고 계시다는 것이 믿어지세요? 우리 자신이 소유하고 있거나 행한 그 무엇에가 아니라 하느님께 믿음을 둘 때에야 비로소 하느님과 참다운 관계를 맺기 시작한다고 말씀드렸지만, 그렇게 하느님을 믿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죠. 우리의 믿음이 튼튼한 것처럼 느껴지는 때도 있지만 또 어떤 때는 흔들리는 믿음 때문에 힘들어 하기도 하는 우리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믿어야 할까요? 아니, 믿는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는 왜 믿습니까?

우리가 무언가를 믿는 이유는 그 대상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모르기 때문에 믿는 것이죠. 무언가를 잘 알고 있다면 굳이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알고 있으면 되니까요. 태양은 매일 아침 동쪽에서 떠서 저녁엔 서쪽으로 집니다. 이걸 믿으시나요? 믿으신다고요? 아니요, 이건 ‘믿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입니다. 매일 그렇게 뜨고 지는 태양을 보면서 알고 있기 때문에 믿을 필요가 없는 것이죠. 우리가 음식물을 먹으면 그 음식물이 위와 장에서 소화되고 흡수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과학 연구를 통해 증명된 것이니까요.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릅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르기 때문에 믿는 것이죠.

그럼 하느님에 대해서는 어떨까요? 하느님을 만나본 분이 계십니까? 실제로 하느님을 눈으로 뵙고, 손으로 만져보고, 그 말씀을 귀로 들어본 적이 있으세요? 성인들이라면 그런 경험을 하셨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우리는 직접 하느님을 만난 적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이 정말 계신지 안계신지는 사실 모르고 있고, 그래서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이죠.

하느님께서 계신지 안계신지를 모른다는 말에 ‘이게 무슨 소린가?’ 하실 분이 있으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예를 우리는 마더 데레사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 의탁하지 않고서는 도무지 할 수 없을 일을 평생 해내신 분인데, 그런 분께서 하느님이 진짜로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끔찍한 상실감을 느끼셨다고 고백하시죠. 물론 성녀의 그러한 체험은 하느님께 대한 불신앙이나 위선의 모습이 아니라 ‘영적 어두운 밤’의 체험으로 이해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우리는 결국 하느님 계신 것을 직접 경험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 정확하게 어떻게 부활하셨는지, 또 성령께서 우리 삶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끌어 주시는지도 우리는 모릅니다. 지난번에 말씀 드린, 하느님 앞에서 보게 될지도 모르는 마지막 시험도 마찬가지죠. 그 시험의 결과가 어떨지, 하느님께서 당신 자비로 나를 받아주실지 아닐지를 우리는 모릅니다. 그래서 믿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모르기 때문에 믿습니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믿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은 기본적으로 약할 수밖에 없고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믿음이 무조건적인, 맹목적인 믿음이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뿐만 아니라 희망과 사랑을 포함하는 향주삼덕은 그 마지막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완성되는 덕들이지만, 그 시작은 인간의 기본적인 이성 능력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예를 들어볼까요? 여기 하얀 찻잔이 하나 있는데 제가 그 잔을 들어 무언가를 다 마시고는 독자 여러분께 방금 커피 한 잔을 다 마셨다고 말씀드립니다. 그런데 그 속을 보니 마치 아무 것도 없었던 것처럼 깨끗한 거죠. 그럼 제 말이 믿어지시나요? 정말 그 잔에 커피가 담겨 있었다고 믿으시겠어요? 믿지 않으실 겁니다. 정말 그렇다면 그 잔에 조금이라도 커피의 흔적이 남아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신부님이 말씀하신 것이니 저는 믿습니다!”하는 분은 안 계시겠죠?

이처럼 우리의 믿음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데도 맹목적으로 갖게 되는 믿음이 아니라, ‘믿을만함’이라는 근거가 있는 믿음입니다. 하느님의 사랑도 마찬가지죠. 태어나면서부터 부모에게 버림받고, 계속해서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면서 평생 한 번도 누군가의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이 그 말을 믿을 수 있을까요? 믿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게 믿을 만한 아무런 근거도, 체험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우리들도 실은 크게 다르지 않죠. 일상의 여러 체험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낄 때는 “아, 정말 하느님은 사랑이셔” 별 어려움 없이 믿지만, 어떤 어려움이 찾아오게 되면 “하느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시는 걸까?” 흔들리게 됩니다. 그리고 더 큰 시련과 고통 앞에서는 하느님의 존재를 의심하게 되기도 합니다. “정말 이 세상에 하느님께서 계시는 걸까? 계신다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지?”라고 말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의 근거를 계속 쌓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한 번 하느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여정 안에서 계속해서 성장해가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더 굳건해지고 더 튼튼해지고, 그래서 커다란 시련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신앙으로 자라나야 하는 믿음입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하느님에 대한 구체적이고 인격적인 체험입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니까 당연히 나도 사랑하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체험입니다. 우리 모두의 삶 안에 함께하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나’의 삶 안에 구체적으로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체험입니다. “아! 그래서 하느님은 사랑이시라고 하는 거구나”,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이 이런 의미였구나!” 깨닫게 되는 체험입니다.

이렇게 개별적이고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체험을 계속 할 때, 우리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의 근거를 계속 쌓아가게 되고 우리의 믿음은 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성장하는 믿음은 단순히 인간적인 차원의 믿음이 아니라 하느님 은총으로 이루어지는 신덕의 차원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믿을 만한 근거가 있어서 믿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근거가 없어 보일 때에도 믿게 되는 것이죠. ‘믿을 만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을 수 없기 때문에 믿는다’는 교부들의 고백처럼, 우리 이성으로 납득되어서가 아니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음에도 믿게 되는 것, 바로 신비의 차원입니다.

그 차원에 들어선 이가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보지 않고도 믿어서 행복한 사람’(요한 20,29 참조)일 것입니다.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근거를 갖추고 있는, 그리고 끝내는 그 근거를 넘어서는 믿음입니다.

민범식 신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rn서울대교구 소속으로 2003년 사제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