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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마당] 나를 일으켜 준 묵주

박경미(아녜스·대구대교구 김천 평화본당)
입력일 2018-03-20 수정일 2018-03-20 발행일 2018-03-25 제 3087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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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해를 맞고 새해 다짐을 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3월이다. 어느 시간이나 아름답지 않은 시간이 있을까마는 내겐 이 새로움이 무척 좋다. 무얼 그려야 할지 모르는 하얀 백지를 받아들고 이 한해는 또 어떻게 보내야 할지 생각하고 계획하는 일이 쉰 중반에 들어선 이 나이에도 이렇게 설렐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축복임을 부인할 수 없다. 벌써 26년이나 지났나 보다. 1989년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에 대구 계산성당에서 남편과 함께 세례를 받고 그해 겨울에 결혼했다. 결혼하고 1년도 지나지 않아 남편 직장문제로 지금 살고 있는 김천으로 이사를 왔다. 신앙생활이 채 뿌리내리지도 못했는데 모든 것이 낯설고 아는 사람도 하나 없는 곳으로 이사를 한 터라 쉽게 냉담하게 되었고 시련의 그 순간이 올 때까지 냉담은 계속되었다.

둘째 아이가 태어난 지 일 년 조금 넘던 어느 날, 14개월이 다 되도록 걸을 생각도 하지 않는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갔다가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고관절이 탈구 되어서 걷더라도 절뚝이게 될 것이고, 심하면 다리를 절단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

병원에 입원시키고, 수술 날짜를 잡고, 하늘이 무너질 것처럼 정신이 하나도 없었던 그때, 한순간 까맣게 잊고 있었던 하느님 생각이 났다. 아이를 병원에 입원시켜 놓고, 병원과 제일 가까이 있는 성당에 무작정 가서 고해성사를 보고 그날부터 묵주를 손에 들었다. 부분절개 후 심을 박아 고정시킨 뒤 통깁스를 하고 나올 거라는 수술 동의서에 사인을 하고, 수술실 앞에서 기다리던 몇 시간. 묵주를 쥔 손에 흥건히 배어있던 땀, 그 견딜 수 없을 것 같던 고통의 시간이 지나고 수술실을 나오던 아이를 보며 난 기적을 체험했다. 칼 하나 대지 않고 마취 상태에서 탈구된 뼈를 맞출 수 있었다는 의사 선생님의 설명, 혹시 다시 탈구될까 봐 허리에서 발끝까지 통깁스를 하고 나온 아이를 보며 처음으로 성모님의 고통이 떠올랐다. 성모님 역시 한 아들의 엄마였음이 분명할진대….

통깁스와 보조기를 번갈아 하며 보낸 3, 4년의 긴 시간들…. 퇴원하던 날부터 통깁스가 불편해 잠도 잘 자지 않는 아이를 데리고 시작한 54일간의 9일 기도는 일 년에 여섯 차례씩 반복되었다.

수술자국 하나 없이 완치된 후에도 나의 9일 기도는 계속되었다. 아이가 위급할 때만큼 절실해지지 않는, 이미 습관화된 기도가 올바르지 않은 것 같아 잠시 쉬어볼까도 생각했지만 십 년 넘게 해온 습관이기에 손에서 묵주를 떼어놓지 못했다.

그렇게 나를 애 태우던 작은 아이가 벌써 25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너무 건강하게, 똑똑하게 잘 커준 아이를 볼 때면 25년 가까이 내 손에서 돌아가느라 닳고 닳은 그 묵주가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다.

나는 어려움에서 나를 일으켜 준 내 닳고 닳은 묵주가 제일 좋다. 알이 닳아서 더 매끈해진 묵주를 돌리는 일은 늘 나에게 힘을 주고 위안을 준다. 앞으로의 생활에서도 이 일은 계속될 것 같다.

박경미(아녜스·대구대교구 김천 평화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