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길에서 쓰는 수원교구사] 골배마실성지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18-03-20 수정일 2018-03-20 발행일 2018-03-25 제 3087호 4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김대건 신부가 어린시절 보낸 곳
순교자현양운동 통해 성지로 개발

김대건 신부 성상이 있는 골배마실성지 전경.

골배마실성지. 김대건 신부가 신학생으로 선발되기 전 어린시절을 보낸 곳이다. 교구 주소록을 찾아보면 ‘은이·골배마실성지’로 함께 표기하고 있지만, 사실 두 장소는 서로 다른 곳이다. 하지만 은이와 골배마실이 비교적 서로 가까운 거리일 뿐 아니라 모두 김대건 성인이 유년시절을 보낸 곳이기 때문에 함께 관리하고 있다.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남곡리 810’. 골배마실의 주소만 들고 골배마실을 찾기 시작했다가 길을 헤맸다. 용인대리구 중심성당이자 은이공소부터 이어 내려오는 공동체인 양지성당 사무실에 들러 골배마실의 위치를 물었다.

골배마실은 현재 양지파인리조트 부지 내에 자리하고 있다고 했다. 리조트 입구에 가보니 골배마실을 가리키는 표지석이 보였다. 입구에서 리조트 앞 로터리를 지나서 비포장도로에 오르니 오른편에 골배마실성지가 있다.

미리내성지가 교구의 성지개발 전부터 이미 성지로서의 위상을 지닌 곳이었다면, 골배마실은 교구가 순교자현양운동을 통해 개발한 곳이다.

골배마실은 김대건 신부가 어린시절을 보냈고, 사제서품 후 귀국해 모친인 고 우르슬라와 함께 머물면서 몇 달 동안 사목했던 곳이다. 양지본당 신자들 사이에서 김대건 신부가 살던 집터라고 구전돼온 이곳에서는 돌절구, 갖가지 생활도구, 맷돌, 우물터, 구들장 등 신앙선조들이 사용하던 물건들이 발견됐다고 한다. 1962년부터 본당 차원에서 교회 사적지로 가꾸고자 노력해온 것이 교구 설정 이후 교구 차원의 성지 개발로 이어졌다.

교구는 1967년 10월 1일 교구 순교자 현양대회를 그동안 해오던 미리내성지가 아닌 골배마실에서 열었다. 현양대회는 양지성당에서부터 골배마실까지 걸어서 행렬하고 미사를 봉헌하는 순으로 진행됐다. 다음해인 1968년에도 골배마실에서 신자 4500여 명이 참례한 가운데 순교자 현양대회를 거행했다.

대회를 주례한 초대교구장 윤공희 주교는 1968년 순교자현양대회 미사강론을 통해 “현대의 우리들도 선조의 뜻을 본받아 교회와 형제를 사랑하기 위해 더 노력해야겠다”면서 “거룩한 교회의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 쇄신하는 교회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그 깊은 뜻을 알아들으려 힘쓰는 것이 복자들 후손인 우리 신자들이 할 본분”이라고 강조했다.

이곳이 김대건 성인이 살던 곳이라는 것을 말해주듯 청동으로 된 김대건 신부의 성상이 성지를 지키고 있다. 현재 골배마실의 정돈된 모습은 1997년 단장한 모습이다. 김대건 신부 상도 그때 세워졌다. 40년 가까이 성지를 지키던 옛 성상은 어디로 갔을까. 바로 성지를 찾기 전 방문했던 양지성당의 마당에 놓인 낡은 김대건 성상이 골배마실을 지키던 성상이었다.

골배마실은 1960~1970년대 미리내와 함께 김대건 신부 현양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김대건 신부 현양에서 시작한 순교자현양운동은 교구 내 각지에서 순교자의 자취를 찾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또 김대건 신부가 세례 받고 신학생으로 선발된 은이성지를 개발하는 계기가 됐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