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주말 편지] 언 땅이 풀리는 시간 / 김소양

김소양 (베로니카) 시인
입력일 2018-03-13 수정일 2018-03-19 발행일 2018-03-18 제 3086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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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핑계 삼아, 벼르고 별러 여행을 다녀왔다. 한동안 만나지 못했던 이에게 불쑥 전화를 걸어 무언가를 부탁한다는 게 불편해서 몇 년째 미뤄왔던 내겐 숙원사업과 같은 일이었다. 마지못해 전화로 몇 가지 서류를 부탁해 놓고서도 우편으로 보내달라는 말을 차마 할 수가 없어서 차를 몰고 나선 길이었다.

그래, 핑곗김에 이곳저곳 들러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얼굴들을 보고 오자. 미세먼지가 범벅이 된 바람이 불어 재껴 창문을 열어놓을 수도 없는데,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먼 산이며 들녘에는 봄기운이 완연했다.

기장에서 볼일을 보고, 해운대에 사는 선배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오랜만에 만난 선배와 새벽까지 얘기를 나누며 하룻밤 자고 난 후, 선배부부가 이끄는 대로 울산 간절곶 바닷가에 있는 음식점으로 향했다. 번호표를 받고 한 시간 넘게 차례를 기다렸다가 맛본, 남쪽 어느 섬에서 캐어온 어린 쑥을 듬뿍 넣은 도다리쑥국 맛이란…. 내가 사는 동네에는 며칠 전에 함박눈이 내렸고 꽁꽁 얼어있는데 이곳 식탁은 이미 봄이었다.

봄기운으로 배를 든든히 채우고 선배부부는 헤어진 후, 그 길로 충북 음성으로 향했다. 운전을 하는 내내 간절곶까지 나를 데리고 와 준 선배부부와 이제 만나러 가야 할 아우에 관한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어쩌다 이처럼 서먹한 사이가 되고 만 걸까. 매일 얼굴을 보고 서로의 일상을 챙기며 지냈었는데, 만나지 못한지 얼추 7, 8년은 되는 것 같았다. 서로를 엮고 있던 고리가 느슨해진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낯선 길을 달리며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 켜켜이 쌓여있던 것들이 하나둘씩 뿌옇게 떠올랐다. 무엇 때문에 이처럼 어색한 사이가 되고 말았는지 전후 사정을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가까웠던 만큼 어느 쪽이 먼저랄 것 없이 서운한 것들이 차곡차곡 쌓여 뭐라고 변명을 하거나 용서를 구하는 걸 망설이는 사이 서먹해지기 시작한 것이었으리라.

그런데 그렇게 절박하게 화가 났던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는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데 떼 지어 어울려 다녔던 골목이며 함께 불렀던 노래들, 재잘거렸던 이야기들과 나눠 먹었던 음식 같은 행복한 기억은 슬라이드 사진처럼 또렷이 떠올랐다. 그런 기억이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 켜켜이 쌓여 있었다는 게 놀라울 지경이었다.

어둑어둑해진 시골길을 따라 아우가 살고 있는 외진 시골동네가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나 때문에 멀리 있는 주민센터에 나가서 서류를 떼어오느라 힘들었을 텐데…. 같이 나가서 늦은 저녁이라도 제대로 사먹어야겠다며 그 집 문을 여는 순간, 입이 떡 벌어지고 말았다.

젊지 않은 사내 둘이 만두에 넣을 속을 준비해놓고, 반죽한 밀가루를 밀대로 밀어가며 만두피를 빚고 있는 모습이라니! 새삼 지나간 일을 떠올려가며 용서할 일도, 용서받을 일도 없었다. 새벽이 가까워질 때까지 우리는 그렇게 빚어놓은 만두를 쪄서 먹고 또 먹었다.

묵은 숙제를 다 풀어낸 해방감 덕분이었을까. 집에 돌아온 다음 날은 종일 잠을 자고 저녁 무렵 마당에 나갔다. 어라, 겨우내 딱딱하게 얼어있던 흙 속에 신발이 쑤욱 빠졌다. 해마다 겪는 일인데도 엄동설한에는 정말 올 거라 믿어지지 않던 봄이 이제 오려는 모양이다. 땅이 풀리면 움이 트고, 어린잎은 쑥쑥 자라겠지. 딱딱하게 굳어있던 것들이 풀리는 이맘때가 참 좋다. 얽어매고 묶기보다 무언가가 풀려나가는 때, 이제 봄이다. 씨앗을 심을 생각에 마음이 절로 부푼다.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김소양 (베로니카)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