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 예레 31,31-34 제2독서 : 히브 5,7-9 복음 : 요한 12,20-33) 예수님 수난과 죽음으로 영원한 생명 얻어 ‘마음’에 새기신 새 계약은 ‘기쁜 소식’되고
통증, 아픔, 상실, 죽음…. 누구나 무의식에서조차 그에 대한 공포로 조급함과 불안함을 갖게 되는 그런 단어들입니다. 성주간을 한 주 앞두고 오늘 복음과 독서의 본문들은, 이런 수난과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진정한 존재로 살아가게 하는 비결을 알려줍니다. 육신적으로 용맹하게 고통과 싸우고 그게 안 되면 정신력으로라도 이겨내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힘들지만 그 고통의 의미를 받아들이고 수난의 시간을 감내하는 가치야말로 십자가와 죽음을 극복하는 길임을 가르쳐줍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유명한 비유를 통해, ‘영광의 시간’은 십자가상 죽음을 통해서만 완성됨을 명시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존재를 포기한 밀알처럼 존재할 때, 비로소 존재의 진정한 운명과 기능이 가동됩니다. 즉 존재는 소멸을 온전히 각오할 때 완성되는 것입니다.
■ 복음 본문의 맥락 요한복음의 본론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전반부(1,19-12,50)는 예수님의 기적과 경이로운 행적들, 즉 ‘표징들’을 중심으로 전개되므로 ‘표징의 책’이라 하고 후반부(13,1-21,25)는 그분의 수난과 죽음이 왜 영광과 구원이 되는지를 설명하기에 ‘영광의 책’으로 불립니다. 오늘 복음의 본문은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그리스인들에게(12,21-22) ‘영광의 때가 왔음’을 알리는 것으로 시작됩니다.(23절)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의 공생활은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아직 당신의 ‘때가 오지 않았음’을 선언하며 시작되는데(2,4) 이제는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음’을 알리며 후반부 ‘영광의 책’을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 소멸을 통해 완성되는 영광 요한복음에 의하면 ‘영광’을 받는 유일한 길은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이는 사순 시기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입니다. 영원한 생명(부활)은 죽음을 통과하지 않고는 주어질 수 없고, 영광도 십자가에 높이 달리는 일을 감내하지 않고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은 하느님의 아들이 영광의 시간에 앞서 마주한 극도의 수난과 모욕을 감추거나 은닉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께서 “바로 이때를 위해 온 것”(12,27)임을 강조합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이 역설을 설명하기 위하여 자연의 섭리 하나를 예로 드는데,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24절)으로 시작되는 비유입니다. 27절부터는 분위기가 전환됩니다. “제 마음이 산란합니다.” 이때 사용된 그리스어는 ‘타락소’이며 무엇인가를 휘저어놓는(마치 물이 담긴 유리컵에 무엇인가를 떨어뜨려 휘저어놓는) 행위를 말합니다. 극도의 교란과 갈등 속에 흔들리는 상태를 묘사하며 깊은 두려움과 의혹에 휩싸여 있는 예수님을 극적으로 묘사합니다. 진정한 용기는 두려움을 모르는 상태가 아니라, 충분히 두려운 상황에서도 무엇을 믿고 무엇을 감내해야 하는지를 구분하여 실행하는 은총을 말합니다. 고통은 두려움과 혼란을 초래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게 함으로써 가장 진정한 내면의 힘을 만나게 해주는 영광 이전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예수님 역시 두려움과 갈등 속에서 번민하시다가 마침내 아버지의 뜻을 따르겠다는 결정을 내리십니다.(28절)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제사가 단지 피흘림의 ‘외적 제사’로만 올려진 것이 아니라 온전히 마음을 다해 아버지의 뜻을 따르겠다는 ‘내적-영적 제사’의 결과이기도 했음을 알려줍니다.김혜윤 수녀(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총원장)